202153일 월요일 - 그리스도인의 의

찬송 449장 

성경 마태복음 5:17-20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많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에, 죄와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가 생긴다. 어차피 은혜로 구원받으니 죄 좀 짓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얻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명령한다(5:13). 복음은 강력하다. 구원받은 성도의 도덕성이 다른 종교인들보다 약할 수 있을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과연 약한가?

먼저, 기독교 윤리의 지향점은 구약 윤리의 폐기가 아닌 완성이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5:17)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구약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삶의 원리들이 아니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일컫는 하나의 관용구다(7:12; 11:13; 22:40). ‘완전하게 하다는 문자적으로 채우다혹은 충만하게 하다는 뜻이다.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것은 율법을 변경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깊고 완전하게 밝혀주시는 것을 뜻한다. 구약의 제사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통하여 완성되었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의 율법을 보다 분명히 밝혀 준다.

둘째, 우리가 실천할 이웃사랑은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의 가르침에 결코 위배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우습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신다(5:19).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13:34)“고 가르치셨다. 바울도 피차 사랑의 빚 외에 아무 빚도지지 말라“(13:8)고 권면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게 있다. 사랑은 단지 감정적 호의나 주관적 실천이 아니다. 사랑에도 법도가 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랑하는 게 아니다.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은 기존의 율법을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웃사랑의 법은 이미 십계명에 계시되어 있다.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을 벗어난 음행을 삼가야 하고, 미움과 언어폭력, 이웃을 해하려는 거짓증언을 그쳐야 한다. 율법 없는 사랑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반대로 사랑없는 율법은 형식에 불과하다.

셋째, 기독교인의 삶은 율법의 요구를 넘어선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요구하신다. 당대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248개 긍정적인 명령과 365개의 금령으로, 613개의 명령으로 정리하여 준수하려고 철저히 노력했다. 문제는 내면적 의가 아닌 형식적, 의식적 의의 수준에만 머무른 것이다(23:25). 겉은 치장하나 탐욕과 불법을 버리지 못한다. 십일조를 드리지만 십일조의 정신 즉 정의, 긍휼, 믿음은 버렸다(23:23).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삶을 원하신다. 겉으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반율법적이진 않지만 초율법적인 것이다.

 

오늘의 기도

죄악으로 오염된 저희들을 통하여 거룩한나라가이뤄지게하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