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중의 찬양 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기독교의 신앙은 예배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가지 가능성과 방법이 있지만 그 중심은 예배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이나 외의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20:3)인데 이는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두 번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출20:5)인데 이는 ‘하나님께만 절하라’, 즉 하나님께만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원어적으로 ‘절하다’와 ‘예배하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분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관심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있으며 그것도 가장 진실된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신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분(요4:23)이십니다. 즉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사실 우리가 죽어가는 영혼을 열심히 전도하는 것도 그 영혼을 예배로 인도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것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진정 예배를 성공한다면 그 신앙생활은 성공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실패한다면 마치 가인처럼 그 삶 자체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 아니라 예배의 역사요 그 변천사이며, 신약에 와서 예배의 비밀은 더욱 깊이 공개되었습니다. 예배는 목숨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배드리다가 박해를 받았으나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했습니다.
예배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바로 예배에는 제물이 있기 때문이요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우리의 예배 자체가 예수 그릭스도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소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짐승의 피가 죄를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히10: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으므로 우리는 소나 양을 잡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2)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자세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제물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에서 우리는 제물이 필요합니까? 오늘 히브리서 본문말씀은 제물이 필요하다고 증거하고 있으니, 곧 찬양의 제물이 그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히브리서 저자를 통해 놀라운 한 가지 비밀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찬양이란 그냥 귀에 들렸다가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입술의 열매요,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아름다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가장 귀한 제물은 바로 찬양이며, 예배란 결국 찬미의 제사인 것입니다.

아마 보통 생각하기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설교시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또 무엇을 받는 시간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시간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배가 “드리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시간입니다. 물론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매일매일의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필요한 대부분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 가운데 풍성히 공급하십니다. 이는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령한 말씀과 은혜와 기도응답과 성령의 인도는 매일매일 체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체험하는 자들이 주일에 모여 그 기쁨과 감사를 드리고 함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무엇보다도 드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이를 물질로 생각하지만 다음 구절은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될 것이라 (시69:30-31)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물질을 드렸다 할지라도 찬양을 실패한다면 그 예배는 실패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진정 예배에 성공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구약에서 온전한 예배가 시작된 시점은 바로 다윗 왕 시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온전한 찬양사역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고의 수준의 예배를 요구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을 때 그들은 아직 진정한 예배를 드릴만큼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고 하나님의 수준을 가르치셨으며 차츰차츰 예배의 본질을 공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 왕 시대에 처음으로 오직 찬양만 하는 자들, 즉 전임 찬양사역자들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 (대상9:33)

이는 예배의 변천사에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는 율법이 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다윗 왕이 이런 엄청난 일을 시작했을까요? 바로 성령의 감동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음악가이며 왕인 다웟을 놀랍게 감동하사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시편은 바로 그 놀랍고도 풍성한 증거들이며 다음 말씀 또한 이를 증거합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삼하23:1-2)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22:43)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을 구약에서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예배를 구약에서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찬양의 관점에서 비로소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찬양은 율법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는 최고의 방법이요, 예배의 중심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과연 찬양에 성공하고 있습니까? 찬양은 회중 찬양과 성가대의 찬양으로 나누어지는데 대강 예배의 순서에 따라 생각해봅시다. 우선 성가대의 가슴 벅찬 첫 송영이 시작되며 예배가 시작되기 전, 기도로 준비하셨습니까? 혹시 너무 늦어 그 시간을 놓치지는 않으셨는지요? 예배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찬미의 제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따라 첫 송영이 시작되기 전, 모두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에 이어서 성가대가 예배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찬양을 하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귀하고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입니다. 바로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나는 예배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럴 경우에도 예배 전에 드리는 찬양을 준비찬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무엇을 준비하기 위한 부수적인 순서로서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좌 앞에 나아가 가장 진실된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교회가 이렇게 찬양으로 충만하게 시작되는 예배를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회중찬양 시간에 믿음으로 찬양하십니까? 자신이 찬양을 너무 모르는 것 때문에 집에서 혼자 찬송가를 들고 연습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며 그토록 귀한 찬양시간을 망쳐버리지는 않으십니까? 찬양은 정말 최고의 영적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그 진실됨을 상실해버립니다. 또 자신의 불쌍한 처지 때문에 눈물 흘리며 찬송했다해서 꼭 찬양을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찬양은 진정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단 하나의 동기가 필요합니다. 예배에 나올 때 회중찬양시간을 기대하십시오! 그런 뜻에서 교회에서 다음 주 회중찬양곡을 미리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최소한으로라도 준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성가대의 찬양시간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가대의 찬양을 잘 들으며 은혜를 받기도 하고 또 속으로 따라 부르기도 하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감상을 하기도 합니다. 요즈음의 성가대는 거의 비전문음악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음악전문인들의 수준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너무 귀가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아무리 성가대가 잘 해도 음악적으로 소리가 어떻고 뭐가 어떻다는 식으로 지적해야 자기가 높아지는 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가대 찬양시간에 아예 교회신문을 보거나 옆 사람과 교제(?)하는 점잖은 분들도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가대의 찬양은 사실 여러분의 찬양을 대표하는 찬양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시간을 내어 모여 연습할 수 없기에 그들이 대신 하는 것이며 여러분이 화음에 맞추어 공교히 찬양할 수 없기에 그들이 대신 연습해서 그런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성가대가 얼마나 힘든 직분인지 아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성가대원은 때로 젊은 지휘자에게 야단도 맞아야 합니다. 마음이 서로 안 맞는 대원을 포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부활절, 성탄절에는 정말 본업이 뭔지 모를 정도로 매일 연습해야 합니다. 정말 순교하는 심정으로 성가대 직분을 감당할 믿음이 없다면 중도에 포기할 것입니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연습하고 기도하고 찬양했건만 만약에 들리는 소리는 “성가대가 영감이 없다”는 둥, “소리가 이상하다”는 둥 그런 말만 들린다고 생각해보세요. 물론 대부분의 성가대원은 믿음이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별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하나님보다도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건만 그들은 불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가대의 찬양시간에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모습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선 찬양을 매우 주의 깊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의 성령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속으로 찬양을 따라 부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 여러분 개인적인 찬양을 은밀히 드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성가대가 영적으로 깊고 음악적으로 완성도 있는 찬양을 드리고 있다면 아마 여러분의 찬양도 그렇게 깊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영원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아니 느껴보세요. 얼마나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인가를 체험해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니까요.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35:2)

성가대의 찬양시간은 하나님께는 기쁨을 드리는 시간이지만 여러분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드리는 것을 넘어서서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가대의 찬양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지요? 찬양은 누가 주시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22:25)

그러므로 성가대 찬양을 들을 때 그 찬양을 단순히 사람들이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만들어진 곡을 하나님께서 음악의 달란트를 주신 성가대원들이 전임 찬양사역자인 지휘자의 인도로 정성으로 연습해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감격적인 순간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왕께 드려지는 최고의 선물을 우리가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도 매 주일마다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이며 축복입니까! 그리고 그 감동을 품고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향하세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찬양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 말씀은 바로 그렇게 찬양의 능력으로 전쟁을 이긴 놀라운 증거의 말씀입니다.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대하20:21-22)

이 놀라운 비밀을 아는 자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또 차 안에서도 마치 왕을 뵈러 왕궁으로 초대되어 가는 것 같은 긴장과 흥분이 있을 것이요, 영적 전쟁에 필요한 능력을 받으러 가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가대의 찬양시간을, 찬양을 감상하는 제3자로서가 아니라 성가대와 호흡까지도 함께 하는 놀라운 하나됨을 느끼는 그런 시간으로 삼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찬양이 성공하면 예배를 성공합니다. 예배를 성공하면 삶 전제를 성공합니다.

이 비밀을 깨달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