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地政學)이란 지리 조건과 정치 현상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만 그런 의미에서는 지종학(地宗學)이라고나 할까요? 수송교회의 지리적 여건에 따른 교구 명칭에 관해 잠시 논해보고자 합니다. 홍성현 목사님께서는 "우리 수송교회는 교우님들 각 가정이 수도권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라고 자주 언급하십니다. 이러한 언급은 69년 역사에 의해 형성된 수송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되는 가정들의 수도권에서의 동서남북 다양한 분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은 언뜻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서의 목회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대단한 단점인 것 같지만 지하철과 고속도로망이 거미줄처럼 발달된 21세기 고도정보화사회 디지털시대의 서울 - 경기 지역에서는 주일 오전의 경우 대게 지하철이나 승용차로 1시간 이내의 접근 거리를 의미하며 오히려 대단한 장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현재 수도권 남쪽 안양시 평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만 향후 아들은 결혼해서 수도권 서쪽 고양시 일산 지역에 딸은 결혼해 구리시나 하남시에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럴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주일날 제가 교회라는 장소를 매개체로 해 가족들과의 잦은 조우를 도모코자 한다면 수송교회는 지종학(地宗學)적으로 가히 이상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난해 2003년 2월 8일 오후1시에 CBS 기독교방송국에서 방송된 대담프로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인의 60%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 중이라고 하더군요. 40%가 이미 이동을 단행한 경험을 소유하고 있고요, 13%가 이 문제로 상담을 원한다고 하네요. 주요 원인으로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교통수단의 발달로 거리보다는 주거지에서 교회까지의 이동 시간을 더 중시하게 되어 (1) 금전 및 애정 문제로 교인간의 갈등 - (2) 목회 방침 및 설교 수준 등에 대한 갈등 - (3) 교회 프로그램에 대한 갈등 등이 주요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수송교회는 지난 2002년도까지는 숫자로 교구명칭을 네이밍 했다가 2003년도에는 '믿음 - 소망 - 사랑...' 등으로 바꾸었습니다. 2004년도에도 교구 숫자를 조금 더 확장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네이밍 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두 방법들은 네이밍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매우 비전문가적인 발상이라고 봅니다. 언어의 선택은 사상의 선택이자 곧 방법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조직체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예를 들어 '교보'가 오늘날 보험업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딱 들어맞는 사상과 방법의 선택에 기인한 것입니다. 저는 숫자로 교구명칭을 네이밍 한다든가 '믿음 - 소망 - 사랑...' 등으로 교구명칭을 네이밍 하는 것은 교구가 추구하는 커뮤니티 아이덴티티 형성과 확장 여건 조성에 매우 역행하는 사상의 선택이자 방법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출석 3~5년차 이하의 새 신자들에게는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상의 대단한 혼란을 조장할 수 있는 무책임한 코드의 선택이라고 봅니다. 정치에서는 지역감정이 조장되면 매우 위험하지만 교구형성에서는 지역감정의 조장이 매우 필요하고 또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교구형성에서의 지역감정은 은연중에 유유상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해방이후 이북에서 뿔뿔이 흩어져 내려온 피난민들이 세운 영락교회는 어떻게 교구명칭을 부여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결과적으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우리 수송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일부 항존직들의 리더십 붕괴, 여러 가지 이합집산의 어려운 문제 등을 감안해 볼 때 저는 아래와 같은 접근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대분류에는 교구장의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합니다. '김충호교구 - 정중해교구' 등이지요. 이 때 장로 등의 직분 표시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분류인 구역의 명칭은 대표적인 시 - 군 - 구 - 동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경우 교회에서 가까운 지역은 대표적인 구 - 동 명칭을, 교회에서 먼 지역은 대표적인 시 - 군 명칭을 적용하는 것이 좋되 그들 시 - 군 - 구 - 동 명칭 사이의 비중을 나란히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가까운 지역은 잠원1구 - 잠원2구 - 잠원3구 - 논현1구 - 논현2구 - 반포구 - 방배구 - 개포구 - 동작구 - 관악구 - 노원구 - 용산구 - 송파구 - 구로구 - 동대문구 등으로 하고 교회에서 먼 지역은 수원구 - 용인구 - 분당구 - 안양구 - 인천구 등으로 하면 될 것입니다. 극소수의 인원들이 산재하는 지역은 설사 그들이 각자 과천 - 안양 - 군포 - 의왕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교우 숫자가 속해 있는 시 - 군 - 구 - 동 명칭 하나를 택해 적용하면 될 것입니다. 이미 네이밍이 확정되었을 경우에는 2005년도부터라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리더의 역량에 따라 조직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수송교회의 가브리엘찬양대 지휘자 조요한 집사님을 볼 때마다 이러한 역사적 진리를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리더가 "잘못된 오케스트라는 없다. 다만 무능한 지휘자가 있을 뿐이다" 라는 말을 명심하면서 조직을 이끌어 갈 때 구역 활동을 통해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인 오늘날 각계각층 조직의 구조는 창의성을 살리기 위한 수평 조직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직에서의 리더십은 과거의 명령과 통제 방식보다는 참여와 협력을 통한 파트너십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으로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 기업들은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감동 - 고객졸도 - 고객행복' 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고객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역 성장의 고객은 누구입니까? 교구장의 고객은 구역장과 권찰이고 구역장과 권찰의 고객은 구역원들입니다. 그러니까 리더십(leadership)은 "교구장이 구역장과 권찰을 구역장과 권찰은 구역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이고, 팔로어십(followership)은 "구역원들이 구역장과 권찰을, 구역장과 권찰은 교구장을 감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으며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상호주의’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수송교회의 교우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리더십과 팔로어십을 겸비해야 합니다. 수송교회의 교우들은 때로는 교구장 - 구역장 - 권찰의 위치에, 때로는 구역원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구장 - 구역장 - 권찰들은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일관되게 내려오는 리더십의 원칙은 솔선수범 입니다. 특히 고도정보화사회에서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5년간 수송교회에 출석하면서 일부 장로 - 안수집사 - 권사들을 불신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부지불식간에 노출해 은혜로운 청유가 아니고 상명하복으로 느껴진다든가 심술이나 횡포, 질투나 시기, 야유로 지각되는 행동들을 다반사로 노출시킨다면 결코 조직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단순한 업무의 협조 요구나 행사의 참여 요청에 불과한 사무적인 태도가 반복누적 된다면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지나친 자아도취에 오염된 인간의 악취로 느껴질 뿐일 것입니다.



교구장 - 구역장 - 권찰들은 조직 구성원들의 현재 능력을 발전시키고 잠재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능력에 대한 평가를 공정히 하고, 적절한 보상책을 마련함으로써 사기를 북돋우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리더는 조직이 크든 작든 조직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입니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조직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