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교회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 교계에는 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성장 제일주의'의 폐혜가 도처에 드러나 뜻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요즘 제가 자주 방문하는 뉴스앤조이(www.newsnjoy.do.kr)에서 눈길 가는 기사가 있어 수송교회 홈페이지에 띄웁니다.

혹시 요즘 가뜩이나 골치아픈 일이 많은데 '이따위 글'이나 올려 교인들을 현혹시킨다는 지적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송교회와 맞는 측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공감되는 면이 있을 수도 있고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한번쯤 진지하게 검토할 내용이 있는 것 같아 소개합니다.



*비록 전재했지만 글이 너무 길고 주제가 무거워 죄송합니다.



한국 개신교,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교회가 가슴 벅찬 희망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필자주/이 글은 '한미준'(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98년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한국갤럽에 의뢰하여 발표한 자료를 분석한 글이다. 시간상 3년이라는 격차가 있지만,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갤럽의 자료가 아직까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읽고 진단하는데 유효하다는데 판단 아래 이 자료를 분석하여 한국교회의 방향성을 그려보고자 한다.



분석에 들어가기 앞서서 우선 이 조사 결과에 대한 해석의 잣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의 목적을 결정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동일한 결과를 놓고 양적 교회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경우와, 질적 변화에 진력하려는 경우는 자료이해에 대해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일 수 있습니다. 영상이미지에 민감한 세대라는 것이 자료로 입증되면 이와 관련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선교전략상 유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상이미지에 집착하는 경우에는, 사고의 깊이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점으로 해서 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않을 경우, 선교적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예언자적 관점에서

교회성장의 방도에 있어서 전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고 한다면, 서로 자기 교회에 오게 하려는 일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이 사회의 영적 구원을 위해 애를 쓸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이 되는 관점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전도는 공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 개인의 병력(病歷)기록을 놓고 한쪽에서는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상대의 허점을 공개하면서 타격을 주는데 목적이 있다면 그 인식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이른바 상품을 팔기 위한 판로 확보와 관련된 마케팅에서는 시장조사가 우선적인 작업입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어디에 관심을 쏟고 있는지를 알아내 거기에 상품생산의 초점을 조준하여 시장을 확대하는 논리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교회성장론은 자칫 이러한 마케팅 논리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통계를 읽어내기가 쉽습니다. 대중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현재의 풍조를 알기는 해야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세상풍조에 거슬러서라도 바로 된 영적 양심을 회복하고 그 터 위에서 하나님나라 선교의 본질을 실현하는데 최대의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의 교회 질서에 대한 예언자적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에 그 출발점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도처에서 대중들의 구미에 아부하는 시장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시장의 대중성과 맞설 각오를 하고 외로운 길을 걷겠다는 믿음이 없다면, 교회의 현실을 파악하는 작업은 시작부터 실패를 예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십자가의 길’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미준’과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조사한 개신교의 실태조사가 가진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그 사회적 위상이 추락해버린 개신교회의 미래를 새롭게 내다보는 일일뿐만 아니라, 그래서 우리사회의 앞날을 새 것으로 만들어내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던지는 일과 직결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 우리는 이러한 예언자적 관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가장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이번 조사결과를 분석해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중심에는 교회가 우리 사회에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는 일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전제라고 하겠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우선 자료는 개신교 이탈률이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가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개신교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개신교가 핍박을 받는 처지라면 이러한 이탈은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전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자기검증이 심각하게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수없이 고민해왔던 문제들, 가령 교회의 양적 팽창위주 선교, 교파분열, 자기 교회 이기주의 등의 문제가 이번 자료에서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은 그간 교회의 성장사 전반에 대한 중대한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물론 보기에 따라서, 교회가 신도들의 범위를 확대해나가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 교회의 기능상 일정한 양적 규모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올 뿐만이 아니라 생존 자체에도 어려움이 생긴다는 이유로 해서 정당화되는 측면이 존재합니다.



또한 보다 바르게 교회의 위상을 정립하려는 도처에서의 노력이 교파 분열로 비칠 수 있으며 자기교회 공동체 내부에서의 일부터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위선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제기된 비판들은 상황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결여된 논리로 반박 당할 수 있기도 합니다. 선교가 양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고, 타락한 세파로 일그러지고 있는 진리를 바로 세우려는 과정에서 분파적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안고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다보니 역부족이 되어 그렇게 자기 교회 중심의 이기주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 바로 그 교회!”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자기 변호가 가능하지 않은 개신교 일반의 기본자세에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주제가 되기보다는 신도수를 중심으로 교회의 위상을 판단하는 논리가 중심이 되고 있고, 오늘의 사회와 역사가 요구하고 있는 과제에 대하여 교회의 일치된 공동체적 노력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무슨 고난의 아우성이 들려도 까닥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어떻게도 변명이 되기 어려운 회개의 대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양적 규모가 비록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진실된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미지가 굳게 서있다면 그 종교적, 사회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소수의 의인’일지라도 이들이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그동안 쌓여 왔다면 개신교의 위상은 사뭇 달랐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여러 가지로 어지럽고 위태한 시대에 교회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매우 귀중한 종류의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던질 ‘소수의 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대중들의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구미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쪽으로 시장의 논리에 따른 “영업”을 하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미지를 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영업이 잘 되는 비결을 배우려는 식으로 양적 규모에 매달리는 교회성장론이 판을 치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그 사회적 진로에 대한 깊이 있는 발언을 하는 힘은 사라지고 마는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아, 그 교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숙연해지고 양심이 뜨거워지며 무언가 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하는 감동을 제대로 줄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로 접근해본다면, 개신교 교회의 전반적인 위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사용하는 예산 내력에 대한 평가와 반응에서도 이러한 개신교의 현실적 위상은 노출됩니다. 사회사업적 측면의 강화, 헌금 지출내역의 투명성 보장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자기반성이 치열하게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교회건물을 대형화하고 수양관, 기도원을 짓는 데나 또는 기타 음향시설과 비본질적인 활동들에 쏟아지는 돈들에 비해 교회가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사용하는 예산이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에 상당히 심각한 도전과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교회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일체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올바로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도저히 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예산사용과정에서도 투명성이 없고, 또 그 사용내역에 대해서도 이 사회의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힘을 모으지 않고 있다면 그런 교회가 한국사회의 고통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게 되고 맙니다. 헌금을 강조하여 돈을 모으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그 돈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뜻에 쓸 것인가를 놓고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만이 결정해버리거나 또는 불투명하게 사용하는 관행이 지속되면 교회는 돈의 권세에서 자유롭지 못한 집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이 많이 들어와 재정이 넉넉한 교회가 발언권이 큰 현실이 당연해지는 상황이 변화되지 못한 채, 소수의 가난한 의인들에 대한 신앙적 차원의 주시는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는 자신의 재정 상태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그에 대한 검증을 회중 전체의 신앙성장과 연결해서 이루어나가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현실생활의 괴리





이와 함께, 신앙생활과 현실생활의 괴리가 큰 것도 개신교의 위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현실 속에 파고들어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들을 붙잡고 신앙인들의 신앙윤리적 결단을 요구하기보다는, 다소 도피적인 차원의 신앙생활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생기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그럴 듯한 신앙인 행세를 하면서 신앙양심에 다소간 안식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교회 밖에 나와서는 비신앙인과 다를 바 없거나 또는 그보다 더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자기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개신교의 영적 위상에 타격을 주고 있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지 못하면, 교회는 일정하게 위선을 보장해주는 집단이 되기 쉬우며 그로써 교회 전체가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하게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랄한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이 신앙과 현실의 괴리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 가운데는, 교회에서 쓰이는 종교용어와 일반현실의 언어를 차별화 하는 풍조에서도 기인합니다. 언어의 이중구조가 그대로 존재하게 되면, 종교언어의 사용현장에서는 경건한 자인 듯 할 수 있지만, 그 언어구조를 일단 벗어나면 아무런 언동도 거리낌없이 하는 유형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튼, 개신교의 이러한 위상이 갖는 문제는 교회생활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가 신도들에게 어떤 것들을 제공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양식을 제공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교인들이 교회에 기대하고 있는 바는 기도, 좋은 설교와 말씀, 그리고 성경공부와 교육모임 등이라고 자료는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인식은 높은 편이지만 목회자가 교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는 대목은 소홀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교회주의로 나가면서 생기는 매우 구조적인 필연성이라고 보여집니다.



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비신자에 비해 윤리적 요구에 상대적으로 보다 강하게 선을 긋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점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윤리적 잣대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개인적 신앙생활의 충실도는 의외로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교인들의 삶이 매우 수동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을 따로 내어서 신앙생활에 요구되는 독자적인 자기훈련을 하는 일이 쉽지 않은 현대생활의 반영이기도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교회안에서의 생활로 그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 인식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바는, 우선 “공동체적 생활에 대한 훈련과 체험”의 요소가 의외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목회자와 교인간의 공동체적 일치감의 수준이 낮아 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율배반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성격은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은혜를 갈구하고 있는 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풀려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의 극복도 사실은 공동체적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주목과 배려의 차원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교인들 개개인의 삶이 나름대로 요구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집중하려 들지만, 공동체적 관심을 기르면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나가는 일에는 크게 주력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고 이는 또한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하여 교회 공동체가 나름의 집단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도 깊은 관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목회자가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상당히 심각하게 반성이 요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환경적 조건들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업무의 폭주에 따른 시간상의 이유라든지, 또는 교인수의 양적 증가가 그러한 구체적 만남을 이루어내는 작업 자체를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목회와 말씀은 진실한 영적 교류의 결여로 인해 강단과 청자(聽者)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적으로 힘있는 말씀으로 연결되기보다는 교리적이고 또, 삶의 정황과 현실적으로 마주하기보다는 관념화된 말씀으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성경공부는 차고 넘치는데...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아픔을 껴안고 나가는 목회가 되기보다는, 성서 연구 자체에 치중해서 그것을 위주로 하는 일방적인 말씀 선포에 자족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아파하는 심령들의 내면에 영적 일치감을 보이면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기보다는 정형화된 성서해석이나 이미 과도하게 윤리화되어버린 말씀을 되풀이 쏟아내는 형식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하면서 이를 돌파해내야 하는 교인들에게 능력이 되기 어려운 말씀이자, 교권주의적 지침처럼 되어서 삶에 새로운 차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메시지를 뿜어내기가 어렵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기도, 좋은 설교와 말씀, 그리고 성경공부와 교육모임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삶 구체적인 도전과 고뇌 등에 직결되어 살아 있는 힘으로 역사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픔의 자리에 함께 하면서 사랑을 부어나가는 작업에서만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적과 개인적인 묵상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인간의 영혼 그 깊은 심연의 아우성과 호소, 그리고 상처에 다가가는 목회자의 모습, 공동체의 마음 쏟기가 중심이 되는 방향이 교회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하여, 교회가 제공하는 양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 진정한 양식이 아닐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어떤 양식을 공급해야 하는 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거듭 거듭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은 언제나 새 것으로 채워지도록 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제의 것은 이미 어제의 것이고, 오늘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오늘의 현실을 감당하고 일으켜 세우도록 하는 것은 달리 새롭게 마련되어야 한다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사람들의 아픔과 깊숙이 만나는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는 믿음의 성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비젼이 있어야



따라서 보다 중요한 질문은 어떤 기도, 어떤 말씀, 어떤 성경해석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압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사의 방식과 결과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신적 한계와 그 고민의 현주소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보다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기도가 약해서도 아니며 성경공부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차고 넘칠 정도인데, 핵심적인 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능력으로 한국인들 그리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새로운 비전을 중심으로 이끌어가고 있지 못한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허를 찌르는 전격적인 성서적 발상, 기존질서의 부정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씀의 칼, 그래서 속히 도려내야 할 것은 도려내고 어루만져야 할 것은 어루만지며 새로운 마음이 일도록 하는 매우 혁신적인 분위기가 교회안에 충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주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작업이 시작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갈릴리 선교현장에서 최우선으로 그의 시선을 모았던 상대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 그런 모습을 교회안에서 재연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양식을 만들어 나누어 나갈 수 있는 교회적 기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집중시켜나가야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당대의 목자들이 양을 털어먹는 것에 분노하셨고, 그래서 새로운 목자를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신도들에게 군림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할 일은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아파하는 것은 감싸고, 부러진 자들은 싸매는 그런 사랑의 능력을 뿜어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용기가 충만한 모델입니다.



이를 받아 예수께서는 자신은 ‘삯군 목자’와는 달리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목자상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말씀에 따라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고 구겨진 영혼을 되살리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랑의 능력이 충만하게 느껴질 때, 교회는 진정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는 단지 성서적 지식과 교회적 습관,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심리적 도피처의 구실이상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보다는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의 껍데기를 쓴 ‘정신요양소’의 아류로 전락시킬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신도가 양적으로 증가한다해도 이는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수십년 동안 깔고 누웠던 누추한 병석(病席)을 들고 일어나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권은 신도위에 군림하게 되고 그 정신세계를 세뇌함으로써 지배하는 덫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한미준과 한국갤럽이 조사한 자료가 총체적으로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바는, 교회가 오늘날 가슴 벅찬 희망의 나라를 보여주는데 그렇게 크게 성공하고 있지 못하며 현실에 시달린 개인적 심성에 대증요법적인 단기적 치료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나사렛 예수께서 회당에서 인용한 이사야 61장의 정신과 그 방향에 대한 지시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선교목적을 이토록 분명하게 인식하고 계셨듯이 우리 한국교회도 이제는 자신을 고통의 한복판에 던져서 풀려나야 할 자를 풀려나게 하고, 눈감았던 자를 눈뜨게 하며 병든 자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뜨거운 감격으로 사랑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실로 이제 하나님의 영이 한국교회에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선포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때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 자유함의 영이 역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선교의 진정한 의미와 그 양식이 주는 기쁨을 참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선을 바로 그런 고난의 현장에 집중시켜나가는 일에서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종호 (2001-02-15 오후 5: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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