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족사 ㅡ 이념대립과 그 극복의 기록



▶소개: 이 글의 필자는 지난 20여년간 본인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로서 언론사 논설실장 출신으로 금년에 만 62세된 인물. '과거사 규명 시국'과 관련해 한 잡지사로부터 가족사를 써 줄 수 있느냐는 주문을 받고 이 글을 써서 우선 먼저 한번 읽어보라고 제게 보내왔습니다. 잡지는 두 주일 후에나 나옴으로 미리 우리 수송교회 고급 독자님들의 심사를 받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어제 오전 주일 예배 때 홍목사님의 설교와도 관련해서 말입니다./ 황부용 집사



[식민지 치하에서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이 땅에 살면서 일제의 모진 탄압을 온몸으로 헤쳐 나왔다가 다시 광복 이후 좌우의 유혈 충돌과 6·25를 겪으면서 이 나라 가족사는 어느 집 하나 성한 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부자간에, 형제간에, 삼촌 조카 사이에 항일과 친일, 친공과 반공이 뒤섞여 왔고 수백만권의 소설을 쓸 수 있는 기막히고 한 맺힌 소재들이 집집마다 쟁여져 있다. (8월 20일 자 조선일보 사설 "대한민국을 부끄러운 나라로 만들겠다고 작정했는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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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날에 배웠던 두 노래와 조부의 죽음



그렇다. 적어도 몇권의 장편소설이 될 만한 내 가족사를 압축해 쓰려하니 우선 유년의 그 여름날, 고향 모교의 교실풍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우리들을 모아 놓고 가르쳤던 두 노래가 생각난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조선인민 공화국 국가’가 그것이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는 구절마다 '빛나는 김일성 장군’으로 끝났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다. 또 다른 노래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풍부한...' 으로 시작됐다. 노래를 가르치는 낯선 선생님은 이 노래를 '우리들의 새 나라인 조선 인민공화국의 애국가'라고 했다.



국토의 중부, 서해안 바닷가의 한촌인 내 고향에 인민군이 '진주'한 그 여름의 어느 날부터 국민학교 3학년인 나와 또래의 학생들은 며칠동안 교실에서 주로 그 두 가지 노래를 배웠다. 누구의 명령인지도 모르는 채 우리가 교실안에서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르는 동안 어른들이 인민군이라고 부르는 군인 몇명이 대나무 줄기로 위장한채 따발총을 끼고 교정의 나무아래 서 있었다..



1950년의 여름은 내 의식에 그렇게 각인돼 있다. 그 여름에 나는 40대 초반의 선친이 인민위원회에 불려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들어오시던 모습을 보았다. 내 당숙이라는 분이 그보다 앞서 6.25전쟁 발발 직후 우리 경찰관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얘기도, 어른들의 수근거림으로 이미 들었던 터였다. 그렇게 흉흉하던 그 여름의 막바지에 할아버지도 돌아 가셨다.



아홉살 어린이였던 나는 17세의 막내 사촌형과 함께 할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봤다. 당신의 장.차남인 내 백부와 선친, 그리고 각각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었던 다른 두명의 사촌형들은 그 임종의 자리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쓸쓸히 이승을 떠난 날은 그 해 8월 23일, 음력으로는 7월 10일이었다. 향년 73세였다



  그가 누리던 부, 그가 쌓은 덕망에 비해서는 참으로 남루한 장례였다. 조부의 시신은 상여에도 실리지 못한채 삼베에 둘둘 말려 밤에 선산으로 옮겨져 묻혔다. 미군폭격기의 기총소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어른들이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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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해 가는 가족 질서



조부는 그 한촌에서 가장 소출이 많은 지주였다. 1877년생이니까 나라의 몰락과 함께 성장했고 그의 청년 시절은 국가주권이 사실상 일본에 다 넘어가간 때였다. 한빈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거의 적수공권으로 재산을 모았다. 젊은 날에 군청의 하급 관리인 주사를 지냈고 한때는 도평의원(道 評議員 )에 추대되기도 했다. 오늘의 광역지자체 의회의원 쯤 되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그는 그 엄격한 가부장 중심주의 시대에 조씨 일문에는 절대적인 권위였고 적어도 군(郡)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진정한 존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찌했든 그는 오늘의 시각으로는 친일인사였다.



  그의 죽음은 우리 가족사에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충효로 대표되는 유교적 가족 질서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이다. 6.25의 와중에서, 오래전부터 우리 문중에 잠복해 있었던 그 붕괴의 가능성은 현실로 표출됐다고 할 수 있다.



  조부는 임종 직전에 두 가지를 예언했다. 당신께서 죽어야 두 아들(내 선친과 백부)이 살아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이 붉은 군대는 벼가 익을 무렵에는 반드시 옮겨 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내 선친과 백부가 되는 그의 장. 차남은 그때 각각 J시에 있는 감옥과 고향 군청소재지인 S면의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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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는 항일 청년, 형은 일제 검사



나의 선친은 말하자면 이름 없는 항일인사쯤 된다. 그는 22세 시절에 고향 인접도인 전남 K시 도심의 어느 신사(神祀) 시설물을 부수어 구속 기소돼 당시에는 D시 소재의 관할 복심법원 형사부로부터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 유예 5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30년의 7월이었다.



1977년에 출간된 한국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집 12권에는 '조 아무개의 신사 손괴사건'이라는 소제목으로 그 판결문 전문이 수록돼 있다.(나는 그 기록도 겨우 10여년전에야 우연히 찾아 읽었다. 불효인 셈이다)



선친은 해방 후 한때 고향 면(面)) 부면장을 했다. 선친의 부면장직은 아마도 그 항일의 보상이었던 셈인데 인민공화국 치하에서는 친일 지주의 차남인 선친의 그 항일은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고 하잘것없는 부면장 경력만이 오히려 반동의 확실한 증명이었던 것이다.



학교 교정에서 예의 '장백산 줄기 줄기'를 합창하고 돌아오던 어느 뜨겁던 날의 오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에게 부축 받고 집에 돌아 왔다. 입고 있던 한복은 피투성이였다. 인민위원회는 그처럼 참혹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내세워 자랑할 정도는 못될지라도 항일은 항일이었던 그의 신사 시설물 손괴는 그 공화국의 혁명에는 무의미한 과거행적이었던 것이다. 며칠 후 선친은 결국 그 군청 소재지 경찰서 유치장에 이송,수감됐다.



  나의 선친과는 달리 그의 형인 나의 백부는 일제의 검사였다. 그 직함만으로도 철저한 친일 계층, 심하게 말하면 일제의 주구였던 셈이다. 그가 주로 어떤 사건을 맡아 온 검사였는지는 애써 추적해 보지 않은 나로서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는 광복 후에 고향에 돌아와 군내의 C읍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정미소도 경영하며 유유자적했었다. 그의 부친(내 조부)이 만들어 놓은 적지 않은 농토, 그리고 검사 생활을 통해 치부한 재화로 더 많은 전답과 임야를 사들였을 뿐 아니라 고향의 바닷가에 드넓은 염전도 소유하고 있는 터였다.



  인민공화국의 이념으로 보면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친일파, 악질 지주, 그리고 혁명의 적, 반동분자의 전형이었다. 군 인민위원회에게 체포되어 인접도의 도청소재인 J시의 '감옥'에 수감된 건 그 때로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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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당한 당숙과 민청간부 친척 형





내 선친과 백부가 감옥과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후한 그 여름 석달동안 내 다른 친족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내 당숙- 그러니까 선친의 4촌 형이 경찰에게 총살당한 때는 앞서 짧게 적은대로 6월 27일, 고향과 인접 B군(郡) 경계지역의 골짜기에서였다.



  그는 바로 그 B군의 남로당 지하 조직책이었다. 경찰의 내사를 받는 가운데 그런대로 지내다가 6.25발발 직후에 전격 체포되어 그렇게 총살당한 것이다. 그는 항일투사도 아니었고 신념에 찬 공산주의자가 될수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 그가 남로당 조직책을 맡은 것도 뭐 거창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고 봐 줄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그는 향리를 떠나 그 B군의 군청소재지인 D읍에서 늙으신 부친으로 부터 간간히 조달받는 쌀가마로 소첩과 유락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내 조부의 아우인 그의 부친도 나름대로의 소출이 있는 소 지주였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반혁명, 반동분자이기 십상인 사람이었다.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우익 친족에 대한 그 가족의 증오를 불러 왔다. 내 선친이 첫번째 대상이었다..



  내 선친을 피에 흥건하도록 폭행한 장본인은 바로 그의 여동생의 남편- 그러니까 선친의 항열을 기준으로 하면 4촌 제부였고 조부로서는 조카사위가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는 선친과 충남 G고등보통학교 동기이면서 당시에는 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던 '혁명 열사'와 합세해서 선친에게 그렇게 폭력을 가했고 결국 반동분자로서 경찰서 유치장에 유치시켰다. 혈족은 인민공화국치하에서 그렇게 악랄한 폭력의 가해자와 참담한 그 피해자로 갈렸을 뿐이다.



또 있다. 내 선친의 6촌 형은 일제 소학교 교장이었다. 그러니 '과거사 규명'대상의 직위를 기준으로 하면 그도 친일 교육의 선봉에 선 사람인 셈이다. 그의 세 아들-내 8촌형들-가운데 장남은 해방공간에서 우익단체인 대한청년회의 간부였다. 6.25발발과 함께 그는 부산으로 재빨리 피난했다. 그러나 그의 두 동생은 고향에 남았다. 둘째는 고향 국민학교 교사였다 서울 대학생이었던 세째도 마침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세째는 인민군이 고향에 진주한후 곧 결성된 민주 청년동맹 부위원장을 맡았다. 둘째는 좌익 교사 조직의 리더였다. 그 여름에 내 8촌 형제들 중 우익 조직에 몸담았던 큰형은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체제를 피해 그렇게 도망치고 두 동생은 똑같은 체제를 위해 또 그렇게 '붉은 완장'을 찾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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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살아 돌아 오다.



조부가 운명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들은 어느 날 향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군청 소재지에 주둔했다가 총퇴각하는 본대에 합류했을 터였다.. '적치'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도시에 주둔했던 인민군들은 서둘러 퇴각하면서 그 도시의 감옥에 수감돼 있는 '반동분자'들을 불러내어 즉결 처형했다. 인민군은 총을 난사했고 그 인민군을 따라온 인민위원회의 남조선 '동무들'은 죽창을 들고 그 광기의 살상에 가세했다. J시 감옥에서 살육의 참혹상이 특히 극심했다는 건 나중에 확인됐다.



그때 내 백부는 그 J시 감방의 한구석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의 아버님(조부)이 노를 젓는 작은 어선에 그의 아우(내 부친), 자신의 두 아들( 당시 그들은 판사시보였다)과 함께 타고 그의 조부(내 증조부)의 유택이 올려다 보이는 어촌 해변에 닿았다. 그 유택이 있는 그 어촌은 내 고향 마을에서 십여 킬로 떨어진 곳이다. 배에서 내린 네 사람은 언덕에 올라 그 유택 앞에 성묘했다. 백부의 꿈은 그런 내용이었다.



꿈을 깨고 보니 그는 감방 구석에 혼자 남아있었고 주변은 시체들이 나뒹굴 뿐이었다. 그는 꿈꾸는 동안 퇴각 인민군 인민위원회 간부등 '처형 집행자'들의 호명을 듣지 못했고 그렇게 해서 혼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것이다. 내 아버님은 그 무렵 고향 B군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도청 소재지인 T시의 감방으로 다른 여러 '죄수'들과 함께 이송되는 도중 한 밤에 역시 기적처럼 탈출에 성공해 살아 남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조부의 두 가지 예언-인민군의 퇴각과 두 아들의 생환은 기적처럼 들어맞은 것이다. 살아서는 집안의 절대권위였던 조부는 그때로 부터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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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오(過誤)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그 여름날에 그렇게 기적처럼 살아났던 내 선친은, 그때로부터 19년이 지난 1969년에 세상을 떠났다. 회갑을 서너날 앞둔 늦여름이었다.당신의 장남인 나는 그때 스물여덟의 신문기자 초년병이었다.그는 아무것도 남긴게 없이 가셨고 나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辛酸했고 죽음은 참담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삶과 죽음은 그의 작은 항일행위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었을까. 불효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인생경영에 실패한 분이다. 그 실패에는 장남인 나의 不敏이 한몫을 했다는 회한이 따르긴 하지만 말이다.. 시대의 격랑속에서 자기 희생을 각오한 이념적 삶도, 생활인으로서의 충일(忠溢)한 삶도 아니었다. 당신은 그저 그렇게 살다 갔다. 그뿐이다..



나의 백부는 그에 앞서 1956년에 60초반의 나이로 생을 접었다. 그 여름으로부터 6년 뒤였다. 일제 검사였던 그는, 바로 그 직위때문에 치부할수 있었고 그 덕분에 안락한 인생을 살다가긴 했다. 그러나 그 분 역시 적극적으로 나라를 배반한 건 아니다.- 라고 나는 믿고 싶다. 말하자면 그 또한 이념과는 상관없는, 실체를 따로 규명해 보아야 별로 나올게 없는 그저 그런 삶을 영위한 사람일뿐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향유한 생존 조건이나 사회적 지위에 비해, 가치없는 인생를 살다 가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숱하고 숱한 법이다. 그도 그렇게 살다 갔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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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돌을 던질수 없는 것을....



그 후대의 삶들은 어떠했는가. 그 생애에 작은 항일행위가 기록돼 있으나 생활인으로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선친의 아들인 나는 평생 잡문을 써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온 일개 서생일 뿐이다.. 그러니 그저 그뿐이다.



일제 검사를 아버지로 둔 내 사촌 형 가운데 작은 형은 법조인으로서 ‘아주 높은 지위’까지 올랐었고 그 형은 평범한 변호사다. 그들은 지금 각각 70대 후반, 80대 초반의 노인들이다. 친일의 후손이이지만 그렇다 해도 어쨋던 그들이 누린 삶의 안락은, 그 부친의 친일때문만이 아니라 탁월한 재능을 바탕으로 한 무서울이 만큼 의 학업정진이 그 바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수 밖에 없다. 그들의 법조인생도 어쨋든 청렴과 강직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나름으로 살아왔고 나라에 봉사한 셈이다. 역시 그 뿐이다.



남로당 조직책으로 6.25직후 총살당한 당숙의 아들-내 육촌형은 서울대 졸업후 공군 장교로입대, 대령으로 예편한 군인이었다. 그는 70세를 못 채우고 몇년전 암으로 고인이 됐다.



민청위원회의 완장을 찾던 팔촌형들은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그것은 행운이었고 그 행운이 시사하는 의미는 크다.



그 여름에 그들 두 형제는 인민군 퇴각 후 다시 향리에 돌아온 우익 청년단 단원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당했다. 그들을 위기에서 구출한 게 당시 판사시보 신분이었던 두 사촌형-그들에게도 8촌-의 도움 덕분이었다..동경 유학생이었고 해방 후 귀국해서 서울대를 졸업한 두 형제는 한해 간격으로 당시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판사시보가 됐고 얼마 되지 않아 6.25를 맞았다 그들은 향리에 가까스로 내려와 적치 3개월 동안 우리 집등 여기저기를 숨어 다녔다. 인민군 퇴각 후 그들은 잠시 고향에 남아 그 민청연맹 부위원장으로 부역한 8촌들을 우익 청년들의 폭력에서 구해 낸 것이다.



그렇게 살아난 그 두 분은 오랜 교사생활 끝에 각각 초등학교 교장과 고교 교장을 역임햇다. 젊은 시절 한때 설익은 공산주의자였던 경력이, 향리의 인정과 친족들의 보호로 노출되지 않은 덕분이다. 그분들도 지금. 모두 70대 중후반으로 병약한 상태다.



자, 가족사의 대강을 이쯤에서 끝내자. 나의 先代들이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었을까를 분석-해석하려면 또 한번 장황한 글을 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그 모든 이들의 자손들이 현재 이 대한민국에서 현실에 부대끼며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건실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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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라 잃은 때로부터 백년이고 그 여름으로부터 54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도 이 나라는 과거사에 매달린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집권여당이 친일규명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을 내놓자 야당은 그렇다면 친북행위도 규명하자고 맞선다. 이 와중에서 실로 54년 동안 금기였던 , 내 유년의 여름날에 따라 배웠던 그 두 노래가 영화(‘바람난 가족)에서도’ 공영 TV의 프로(KBS '수요 기획)에서도 흘러 나오는 지경이 됐다.



눈을 밖으로 돌려 보면 우리 주변국들의 패권다툼이,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의 시원(始源)이 된 국권상실의 그 시기처럼 암암리에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과거사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려하는가. 아니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수 있단 말인가.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결국본격적인 증오의 시대가 다시 오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