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와 김병수



홍명보는 원래 스트라이커 출신이다.

동북고 시절만해도 그는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날렸다.

그런데 그의 포지션이 바뀐 것은 고려대 입학후부터.

당시 스카우트에 관한한 라이벌 연세대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려대가 알짜 선수를 모조리 훑어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가지 있었지만 협회라든가 축구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려대출신 인맥이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못해도 고연전(연고전)에서 이기면

일년농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때문에 고려대는 괜찮은 선수다 싶으면

포지션의 중복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스카우트했다.연세대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찌보면 홍명보도 희생자(?)였다.

고려대 시절에도 링커로 뛰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워낙 쟁쟁한 선수가 많아 주전으로 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홍명보가 대학2학년때쯤이나 됐을까.?

“어이,고려대에 죽여주는 선수가 한명있대”

“누군데?”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프리킥이 끝내준대.백발백중이래”

누군가가 전해준 그 선수는 홍명보였다.결승전이라서 그런지

자주 볼 기회는 없었지만 정말 그의 프리킥은 일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각될 기회를 아직 얻지 못했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건 90년이탈리아월드컵.당시 그는

후보로 선발됐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부상을 입어

대신 그 자리를 채웠다가 이회택 감독의 눈에 들어 붙박이로 대표팀에

남게 된다.



홍명보가 수시로 링커로 기용돼 해결사 역을 해낼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트라이커 출신이었기 때문이다.그가 포항에서 현역으로 뛰던 시절

팀 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벤치에서 플레이메이커로 뛸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체력소모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미드필더도,스트라이커도 아니었다.



홍명보가 최근A매치 최다출장기록(122회)을 세웠다.

그가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분명 있다.그것도 여러가지.

첫째,홍명보는 거의 부상이 없다..부상을 입지 않는 것은 대단한 노하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김주성(미안한 얘기지만 그는 머리(thinking)가 없다)이 독일 분데스가에서

배워온게 하나 있다면,잘 넘어진다는 것이다.상대 선수의 태클이 걸리면

한바퀴 굴러 넘어졌다.그러면 부상도 방지되고,재수 좋으면 파울도 얻어낼 수 있다.

그가 독일에 가기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반면 황선홍은 최고의 스트라이커임에 틀림없지만 대학시절부터 부상의 연속이다.

물론 공격수가 부상할 위험이 훨씬 높지만,그래도 황선홍의 경우엔 너무 심했다.

황선홍이 기량만큼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은 부상방지를 위한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없었기 때문이다.(차범근의 경우를 보라.그는 부상의 많지 않았다)



둘째,당연한 얘기같지만 포지션이 수비수였기 때문이다.체력소모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셋째,운동외에 다른 것(이성교제,술,담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최순호의 경우

술을 엄청 마셨다.야구나 농구선수중에 술고래가 많지만(이충희,허재,선동열 등등)

축구는 다르다.체력소모나 강도에 있어 비교가 안된다.최순호는 강남에 단골 룸살롱에서 수시로 퍼 마셨다.술 마신 다음날 뛰면 하체가 풀리는 것은 당연지사.”저놈,또 술마셨군”

혀를 끌끌 차는 감독의 모습을 여러 번 봤다.그럼에도 그가 경기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대신할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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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적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취재수첩이 남아 있었으면

보다 구체적으로 쓸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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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진짜 그는 아까운 선수다.

그가 일찍 시든건

.부상때문이었다.



병수는 고교시절에도 제대로

뛴 적이 없다.

특히 발목이 자주 망가졌다.

대부분의 경기가 인조잔디에서

열리다보니 부상이 자주 나올 수 밖에..



당시 경신고 이경이 감독.

“병수 어때요”

“음,안좋아”

“또 뛰게 할꺼에요?”

“이틀 쉬면 괜찮을걸”



한번 채이고,보름 쉬고

또 채이고 한달 쉬고…

병수의 고교시절은 그렇게 흘러갔다.



병수가 고려대로 진로가 전해졌을 때…

용문고감독 왈.”병수,재 완전히 갔어요.

아마 1년도 못버틸걸요”



그럼 이경이 감독은 왜 그토록 병수에 집착했을까.

대학에 가려면 4강에 들어야 한다.4강에 오르거나

우승할 수 있는 길은 성치 않은 몸의 병수를 투입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고에 임근재란 선수가 있었다.

한때 득점왕에 올랐고 연세대를 거쳐

LG에서 뛰다 은퇴했다.내가 보기엔 체격도 작고 기술도 별로였다.

근데 연습할때나 경기를 할 때

감독이 꼭 “근재한테 넘겨”라고 외친다.

다른 선수에겐 주면 더 좋은 슈팅찬스가 날텐데 말이다.



감독 왈,”재내 아버지가 매년 1000만원 갖다줘요”

당시 축구부 1년예산은 3000~5000만원.대부분 학부모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는데,1000만원의 거금을 쾌척하니

스타로 아니 만들수 없었던 것이다.



삼천포로 빠졌다.

아무튼 경신고 이감독은 선수가 망가질줄 알면서도

당장의 이익에 급해 선수를 망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떡하나?

성적 못내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누굴 탓해야 할지…



병수가 청소년대표(16세이하)에 선발됐다.

천재 미드필더가 떴다고 난리였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전문가의 견해일뿐이었다.



병수는 그때까지도 잦은 부상으로 객관적으로 기량을 입증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당연히 매스컴에도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육사구장에서 그의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를 혀를 내둘렀다.

“어느 정도에요?”

“타고났어.최순호 이상 갈꺼야”



병수가 만일,

선수층이 두터운 축구팀에 있었다면…

성적을 내지 못해도 감독이 못을 벗지 않는

여건의 학교로 진학했다면….

4강제도라는 선수 죽이고,축구 죽이는 제도가 없었다면…

그는 나카타 보다 위대한 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