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집사님 지적은 다소 '침소봉대'로 오인될 수도 있겠군요. 수송교회에서는 봉사 문제로 관련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교회 출석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 종종 청취됩니다. 영혼의 사우나를 위해 교회를 찾았다가 봉사 등의 지엽적인 문제로 오히려 그 영혼이 더욱 황폐해질 수 있다면 누가 수송교회를 찾겠습니까? 실패한 투자로 여겨집니다. 깨끗이 세척한 후에 비닐 봉지에 싸서 창고에 보관하는게 좋을 것 같군요. 교회에서의 봉사는 명령이나 강요되어서도 안되며 또, 그 결과를 함부로 비판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각종 봉사 영역들은 대게가 존재하면 좋은 것들이나 곰곰히 따져보면 실은 없어도 신앙생활에 큰 지장은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38-42).



이 이야기를 얼핏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마리아가 더 이기주의적인 것 같고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더 헌신적인 것 같이도 보입니다. 왜냐하면 마르다는 집안에 오신 손님들 곧 주님과 그 제자들을 접대하기 위해 분주히 일하고 있었는데 반해서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 손님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함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고 마르다에 대해서는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사실과(시 51:6) 또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한 사실에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삼상 2:3과 왕상 8:39; 눅 16:15도 참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중심 곧 그들의 행동의 동기를 보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즉 마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무슨 일을 분주히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기심에서 온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위한 것이고 주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르다는 주님께 대한 불평이 생겼고, 또 그의 불평하는 말 속에는 '자기'가 많이 들어가 있었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즉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물론 마르다 자신은 정직한 마음으로 자기가 그러한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르나 그러나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이기심이 본능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하여 이르기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22)라고 말하게 된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나름대로는 주님을 위해 말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사단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되었으며,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죽음을 각오하지 못한데서 나온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중심을 읽으시는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3-24)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는 그의 동기가 온전히 순수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같이 개인의 이해관계나 사심이 있어서도 안되고 또 베드로와 같이 인간적으로 생각해도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다가 그 동기와 본심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과 주님께 대한 본의 아닌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즉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하고 주님께 감히 원망과 불평 내지는 항의를 하는 그런 과오를 범했고, 이어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하여 주님께 감히 명령을 하달하는 그런 무례함과 불손한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의 경우와 그 근본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민망해지신 마음으로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두 번씩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고 면책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마르다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관계로 마음에 평안과 안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겠습니까? 그 "많은 일" 가운데는 접대 준비에 관계된 많은 일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마르다가 자기를 의식하고 주님과 동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데서 온 여러 가지 혼란한 생각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되어집니다. 말하자면 마르다는 주님께서 자기의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시고 알아주기를 기대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데 대한 불편한 생각, 그리고 혼자 애쓰는 그런 자기를 안쓰럽게 보시고 자기 동생을 시켜서라도 "마리아야, 네 언니가 혼자 저렇게 애쓰고 있으니 가서 도와주면 좋겠다"고도 말씀해주시지 않은데 대한 불편한 생각, 그리고 동생 때문에 자기는 피해를 입고 있다는 피해 의식, 기타 이런 많은 일들로 마음이 복잡해 있었던 것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가 있도다"(눅 10:42 방주를 참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족한 한가지는 무엇을 가리킨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마리아에 대해 말씀하신 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이 좋은 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이 좋은 편"은 무엇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마리아가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 한 것을 가리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 그 한가지 부족한 것, 곧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등한히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평안과 안정을 잃고 원망과 시비, 또는 무례와 불손 등 갖가지 육신의 일을 나타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부엌 일하는 것이 싫어서던가, 아니면 언니 마르다가 하는 일을 도와주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주님을 둘러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조바심한 나머지 언니를 도와 부엌일을 할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갈까 하는 이 두가지를 놓고 생각하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로 마리아는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 자라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마음은 주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마리아가 그 언니가 불평하는 중에도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은 그의 조용한 모습에서 엿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그가 택한 그 "좋은 편"을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축복을 평생토록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주님을 위한 봉사보다 앞서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봉사는 예배의 열매이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매일 매일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무런 대가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때로는 가까운 다른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불평과 시비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좋아하시고 또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변호해 주시며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만일 누구든지 마르다와 같이 집안 일에 분주한 나머지 매일 아침에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외면하거나 등한히 한다면 그는 마르다처럼 외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불만적이고 비판적이며 염려와 근심이 가득차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원망하고 나무라며, 심지어는 주님께 명령을 하달하는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이 되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만일 누구든지 마리아와 같이 매일 아침에 주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는 "이 좋은 편"을 선택한다면 그는 마리아처럼 영적인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주님께 무엇이든 드리고 싶어하게 될 것이며 또 그 향기는 멀리까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로 인해 크게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