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지난 5월 18일에 북한선교회와 평화와통일신학연구소 공동주최로 여열렸던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강연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적 반성








정 종 훈 (연세대학교 교목실 교수)








1. 문제제기: 분단의 역사적, 사회학적 의미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의 역사를 오랫동안 지속해온 우리 민족이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의해 분단된 지가 어느덧 반세기하고도 6년이 지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과 식민지정책으로 인해 원치 않는 굴곡의 역사를 35년이나 거친 우리 민족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전개하리라는 부푼 희망 속에 8.15 해방을 맞이했으나, 실상은 민족분단이라는 새로운 질곡으로 빠지고 말았다. 식민지 피지배기간에도 끊임없이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였던 우리 민족이지만 독자적인 힘보다는 외세의 힘으로 해방에 이르렀다는 자기한계로 인해서 우리 민족은 국토와 민족이 반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러한 분단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 심어놓은 식민지잔재의 청산을 어렵게 했고, 남북에 각각 세워진 양쪽의 분단국가들로 하여금 무력통일도 불사하도록 함으로써 6.25 민족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게 했다. 또한 남북 분단국가의 정부들은 정통성경쟁의 미명 아래 자신들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기회로써 분단을 이용하기도 했다.


한편 남과 북의 정권들은 통일의 가치를 앞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서로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 있어 왔고, 통일담론을 독점함으로써 민간 차원에서의 다양한 통일논의를 억압해 왔다. 그들은 명시적으로는 민족을 회복하고 남북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면서 통일을 말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소수 비민주적 권력주체의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써 통일의 과제를 변질시켜 왔다. 또한 그들은 민족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계급의 문제를 은폐하기도 했고, 계급적인 문제제기가 있을 때에는 분단상황의 적대적인 위협을 운운하며 민중과 민중운동을 탄압하였다. 남과 북의 분단은 처음부터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남북 권력주체의 이해관계에 의해 유지 강화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남북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분단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시키는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살아 왔다. 현재 국민의 정권은 햇볕정책이니 포용정책이니 하며 남북관계를 어느 때보다 호전시켜서 2000년 6월 13일에는 남북정상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괄목할만한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그러나 그동안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는 점에서 분단극복과 통일에로의 길은 아직은 힘겨운 길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더욱이 1997년 12월 이래로 이남에 불어닥친 IMF 시대는 우리를 신자유주의의 경제체제에로 급속하게 편입시키고 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려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지구화는 다국적 기업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강대국들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구화로 인해 무한경쟁의 정신이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고, 자본은 더 이상 자신의 조국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전세계적으로 확장되는 지구화로 인한 이득은 극소수에게로 제한되고 있다. 평생고용의 개념은 사라지고, 불안정은 가중되고 있으며, 실업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변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시장민주주의를 강요하는 한편 복지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요인을 해체하고 있고, 전세계적인 차원의 빈부격차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우리 민족은 분단이라는 민족적인 모순과 기득권자들의 자기수호라는 계급적인 모순을 아예 방기할 위험 앞에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의 지구화에 직면해서도 분단을 생존의 문제이자 신앙의 문제로 이해하고, 분단극복과 통일의 모색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범한 과오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 과오로부터 철저히 돌이키는 것을 시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죄고백





분단시대 한국교회는 분단시대를 극복하는데 기여하였는지, 아니면 분단시대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는지를 대답해야 한다면, 대답하는 자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그 내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성적인 차원에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죄과를 먼저 고백함으로써 분단시대에 익숙해진 부끄러운 삶의 방식으로부터 돌이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죄고백은 말로만 또는 문서로만 진행되어서는 안되고, 구체적인 모든 영역에서 그 부끄러움을 실질적으로 돌이키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해방직후에 일제 하에서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범한 부끄러움을 죄고백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민족양심의 보루가 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한다.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는 분단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상황에 대하여 신앙적인 성찰을 해야 했다. 일제 하에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신사참배에 응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주일성수를 하지 못하고, 교회를 전쟁준비 공회당으로 사용하도록 비어주며, 교회 종탑의 종까지 떼어 전쟁군수물자로 내주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젊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누이와 딸들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도 침묵하거나 오히려 부추겼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신성화함으로써 하나님의 평화를 왜곡하였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였던 교회지도자들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한국의 각 교파들이 일본교회에 강제적으로 합병되어 그 고유성을 상실하였는데도 이를 찬양하고 축하하였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일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민족투쟁을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죄고백을 국가와 사회 앞에서 모범적으로 실행함으로써 민족으로 하여금 과거의 부끄러움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작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 세상의 역사란 것이 잊으면 언제라도 반복되는 것임을 철저히 깨닫고 사회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철저히 고백하였다면, 오늘의 한국민족은 훨씬 더 성숙한 민족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과거의 부끄러움을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는데 급급하였고, 교회 내의 정치적 헤게모니 쟁취에 혈안이 되어 부끄러운 과거의 죄와 씨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민족이 한국전쟁으로 내몰렸던 것과 분단 이북에 대해 적대의식을 고양시켰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한다.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산을 강탈당하고 기독교 신앙의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월남한 기독교인들에게 반공의식은 인지상정일 수 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용서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게된 것이 기독교인의 존재라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을 철천지원수로 보기보다는 용서와 화해, 나아가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어야 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통독이전의 서독교회가 평화를 제안하는 사회백서에서 제시했던 '원수사랑'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수사랑은 적대자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알랑거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적대자를 희망과 공포 그리고 공격성에 의해 움직여지는, 죄 있는 인간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하지 않고, 적대자를 악마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양쪽의 실제 요구와 관심을 과장시켜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적대자를, 적대자 안에서 자기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은 적대자의 인격성의 승인이자, 적대자에 대한 왜곡된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한편 원수사랑은 적대자를 공동의 삶을 위한 동반자로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신뢰의 형성을 통해서 상호 안전보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전보장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적대자 모두를 위해 공동의 보조를 맞출 때만 보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공산주의자들을 원수로 보았다 할지라도 주님의 명령에 따라 원수사랑의 대상으로 전환하였다고 한다면, 자신들의 아픈 경험에 머물지 않고 이북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분단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독재정권 앞에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주저하거나 회피했다. 그리고 빚진 자로서의 신앙적 속성과 원수사랑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냉전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매몰되어서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애당초 사악한 집단이며, 타협과 대화의 대상이기보다는 초전에 박살내야 할 대상이라고 속단해버렸던 것이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분단 이후 등장한 이남의 각 정권에 대해서 신속히 신적인 재가를 한 반면에 그 정권의 불의에 대해서는 예언자적인 도전을 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교회에 호의적인 장로라는 이유로 절대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그의 선거부정까지도 옹호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한국교회는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환영하였고, 물질적으로 잘 살아보자는 그의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편승하여 물질적인 복을 강조했으며, 독재자인 그를 위해서 국가조찬기도회를 오랫동안(1회-11회) 주관해 왔다. 심지어 한국교회는 12.12 쿠데타를 통해 이미 정권을 움켜잡은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이 정권의 외형적 정당성을 만들고자 5.18 광주민주화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총칼로써 무자비하게 진압했을 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조찬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 조찬기도회에는 한국교계의 교단장급이었던 23명의 인사들이 참석하였는데, 그들 모두는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무력진압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전두환이 자신의 정권을 창출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한국교회는 선거로 뽑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노태우에 대해서도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을 통한 제어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못했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지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는 교권분열을 자행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교계에 예언자적인 목회자와 평신도 기독교인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각 교단의 대다수 주류 실세들은 정교분리와 교회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불의한 정권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만일 그동안의 이남 정권들이 국민의 자발적이고 실질적인 지지기반 위에 창출된 정권들이었다고 한다면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았을 것이고, 그 정통성을 기반으로 자신 있게 이북정권과 협상도 하며 통일의 노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발부터 잘못되었던 정권들은 잘못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교회는 잘못된 정권의 출발에 대해서도 악순환의 잘못에 빠진 정권에 대해서도 무관심과 무책임 그리고 무기력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넷째로, 한국교회는 천민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맹종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신앙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한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 하는 청교도의 금욕주의적 합리적 경제활동이 자본주의의 정신을 낳았다고 한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도덕성과 종교성을 배경으로 생겨났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오늘의 자본주의는 본래적인 정신을 망각하고 맘몬이즘과 결탁함으로써 천민자본주의로 전락해버렸다. 특히 한반도의 이남사회는 제 3공화국의 성장이데올로기와 함께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는 물신숭배적인 천민자본주의를 심화시키는데 일조했다. 한국교회는 천민자본주의를 선도하기보다는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는 순복음식의 축복을 남발하며 천민자본주의를 부추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자신으로부터 나누어지는 복보다는 자신에게로 모아지는 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한했고, 이 세상에서도 모든 복을 다 누리고 저 세상에서도 천국에 이르자는 신앙의 이중이기주의를 양산했다. 엄밀히 말해 기독교신앙은 어떤 이데올로기와도 자신을 동일화할 수 없는 초월의 신앙이다.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당파적인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담보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신앙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남북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못했고, 하나의 대안일 수 있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가능성을 타진해보지도 못했다.





다섯째로, 한국교회는 교파분열과 지역주의 그리고 개교회 성장주의에 빠져 교회일치와 연합운동에 실패하였고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변혁에 기여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죄고백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해방이래 지금까지 각 교단상층부의 이해관계와 헤게모니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이합집산의 교파분열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교파분열의 이면에는 지역주의가 교묘하게 작용하였으며, 지금은 같은 교단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지역성에 기반하여 분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지역주의란 도단위의 지역은 군단위의 지역으로, 군단위의 지역은 면단위의 지역으로 다시 쪼개지면서 폐쇄된 지역의 친밀성을 더욱 강화하는 법인데, 이 친밀성은 타지역에 대한 배타성과 자기지역 이기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어느 사회보다도 지역주의 병폐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데, 이 지역주의를 극복함에 있어서 한국사회는 한국교회에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 내의 지역주의가 한국사회 내의 지역주의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의 교회는 단일성과 보편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파분열과 지역주의의 빈번한 경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의 최소단위인 개교회를 우선시 하였고, 이는 교단도 지역노회도 믿을 수 없고 제일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교회 말고는 없다는 불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교파를 넘어선 교회일치와 연합은커녕 교단내의 교회일치와 연합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대의보다는 자기교회만 성장하고 부각되면 된다는 소아의식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는 자기교회의 성장에 대한 파편화된 관심 때문에 교회를 담고 있는 전체 사회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고 있으며, 더욱이 사회구조적인 차원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로 나가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에 있다.








3.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





분단시대의 한 가운데 있던 한국교회는 분단의 극복과 통일을 위해 크게 기여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끄러움에 빠져 있었고, 그 부끄러움을 정당화하거나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독특한 신학을 발전시켰다. 한국교회의 이 독특한 신학이야말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부끄러움이며, 청산해야 할 다른 부끄러움들을 오히려 강화한 요인이기도 했다.





첫째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은 율법의 제 3용법을 결여한 복음주의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 주는 몽학선생이고, 인간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이해된다. 물론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질적으로 새로워진 인간이 은혜에 상응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함을 전제하고 있지만, 루터를 바라보는 이들은 은혜 자체를 과도하게 강조하느라고 은혜 받은 자의 상응한 삶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칼빈은 루터와 달리 율법을 세 가지 용법으로 구분함으로써 은혜 받은 자의 성화의 삶을 요구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제 1용법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인간의 죄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고, 율법의 제 2용법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고 악을 자행하는 이들에 대한 재갈과 같은 것이며, 율법의 제 3용법은 신자들을 교훈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하는 지침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죄된 삶을 고발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는 동시에 율법을 어겼을 때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악한 행위를 하려는 사람으로부터 사회와 그 구성원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며, 나아가 신자들에게 선행을 가르쳐 촉구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떤 경우에도 율법이 폐기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루터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은혜에 상응한 삶, 칼빈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율법의 제 3용법을 간과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책임적 삶을 소홀히 하였다. 사실 존재를 규정하는 직설법(Indicative)이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는 명령법(Imperative)보다 더 강력한 규정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루터의 반쪽만을 붙잡고, 그것을 복음의 전부라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모르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 영광의 신학을 모르는 십자가의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되는 신앙이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신앙을 왜곡하는 것이다.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외면하고 부활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영광을 말 몇 마디의 고백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구원은 보장된다고 믿는다. 또한 이 세상은 악하고 더러운 것 투성이이니 될 수 있는 한 세상일에는 무관한 듯이 살다가, 주께서 부르시는 날 기쁨으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부활의 영광을 외면하고 십자가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전투적인 삶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처럼 세상의 고난의 현장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라지나 삯군이라 하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민중들이 곧 구원자 예수라고 고백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자신과 동일화하셨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지극히 작은 자들을 우상화하고, 작은 자와 대립되는 자들에 대해서는 쳐부수어야 할 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속죄의 값으로 치른 값비싼 종교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부활을 소망하며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영광을 미리 경험하는 기쁨의 종교이다. 또한 기독교는 부활을 소망하기에 지금 이 세상의 고난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종교이고, 지금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부활을 소망하는 종교이다. 본질이 그러한데도 한국교회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양자택일함으로써 기독교신앙을 왜곡하였고, 특히 영광의 신학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삶의 현장 속에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과제를 외면하였던 것이다.





셋째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은 바울의 신학과 야고보의 신학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바울의 신학을 앞세운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은 율법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사는 존재이다. 물론 바울은 사랑의 근본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외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오를 선언했던 것이지, 믿음의 행위까지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존재였다. 물론 야고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경험한 자가 그 사랑을 형제에게 실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행위를 추동하는 믿음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은 믿음 없는 행함이 문제였기 때문에 믿음 없는 율법적 행위를 부정했던 것이고, 야고보의 신학은 행함없는 믿음을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행함 없는 말뿐인 믿음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도 야고보도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행위와 행위의 믿음이었다.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행위를 지향하고, 행함은 언제나 믿음의 기초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바울의 신학은 믿음과 은혜로, 야고보의 신학은 행함과 율법으로 이해하고, 행함과 율법의 야고보적인 차원을 무시하였던 반면에 믿음과 은혜의 바울적인 차원을 선호하며 가르쳤던 것이다.





넷째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상호보완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대립과 정죄의 기회로 삼은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계에서 보수신학의 거두는 박형룡, 진보신학의 거두는 김재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람은 성서해석에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거부해야 하느냐, 아니면 적용해도 되느냐를 분기점으로 하고 있다. 박형룡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를 일 점 일 획도 틀림이 없는 성서로써 있는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고, 김재준은 인간의 삶과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성서를 인간역사의 지평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박형룡의 보수신학은 기독교신학의 신앙적 순수성을 보수하는데 비중이 컸고, 김재준의 진보신학은 기독교신학의 사회적 역사성에로 나아가는데 비중이 컸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순수한 정체성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신앙의 역사적 관계성에로 나아가는 것이 주저되고,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관계성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신앙의 순수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반비례관계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 보이는데, 사실 기독교신앙의 정체성과 관계성은 정비례관계에 있다. 신앙의 깊은 단계에 있을수록 삶의 현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이고, 삶의 현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정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정체성은 언제나 관계성을 요구하고, 신앙의 관계성은 언제나 정체성의 확인을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주장인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보수신학 계열은 삶의 현장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을 저버렸고, 진보신학계열은 신앙의 자기정체성을 견지하는데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다섯째로,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신학은 무책임한 정교분리와 이기적인 정교밀착의 혼란 속에 있는 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신학이 즐겨 인용하는 성서구절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막 12:17)는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정해진 위에 있는 권세들(세상관헌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이사에게는 세금을 바치면서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었고, 더 나아가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의 것이라 한다면 가이사는 하나님 앞에서 한계를 지닌 존재이며, 그러므로 삶의 모든 우선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두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또한 바울의 가르침도 그 이하의 구절들까지 포함해서 읽으면, 세상의 모든 관헌이 예외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권세를 행사하는 관헌만이 바로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것이니,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언자적인 책임을 수행해야 할 정치권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정교분리를 주장했고, 저항해야 할 불의한 정치권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 정교밀착을 조장함으로써 구체적인 책임을 회피하였던 것이다.








4.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여명





분단시대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신학과 부끄러운 행태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일부에서는 우리의 민족사와 세계사를 향한 작은 불씨를 지켜 왔다. 이것은 불행중 다행이며,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이 불씨를 붙잡고 큰불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첫째는 민중지향의 민중신학과 민중친화적 민중교회가 보여준 민중운동이다.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지만 민중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고, 민중을 신앙의 과제로 제시한 것은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주님이지만, 그 분은 언제나 약자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을 견지하셨다.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분단시대의 민중은 언제나 불이익을 당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이익과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특별한 부류로 취급하는 동시에 민중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주변인으로, 마음대로 다루어도 좋은 무식한 대중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였다. 대부분의 기성교회들은 민중들 다수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교회의 운영은 사회적으로 대우받고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는 사람들 중심으로 꾸려왔다.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힘없고 가난하며 능력 없는 민중들이 이처럼 주변부로 떠밀려 소외받는 상황에서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는 약자우선의 당파성과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빈익빈부익부의 문제를 저지할 수 있는 보루라 할 수 있다. 이제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는 분단시대의 체제경쟁으로 인해 본래의 주장을 제대로 피력할 수 없었던 20세기의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21세기 신자유주의의 전체주의적인 횡포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신의 역할을 새롭게 찾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통해 가시화된 희년운동이다. 1988년 2월 29일에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신앙고백과 이 선언의 신학적 근거를 다루고 있고, 둘째 부분에서는 통일의 원칙과 함께 그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실천사항들을 남북정부를 향해 건의하고 있으며, 셋째 부분에서는 남북교회의 교류방문, 민족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평화통일교육, 1995년 평화통일의 희년선포 등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과제를 제안하고 있다. 이 선언은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실제 이남 정부의 통일정책에 반영되기까지 했다. 우리는 이 선언에서 실천항목으로 제안된 1995년 평화통일의 희년선포를 위해 남북교회가 기울인 실천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교회가 제안한 희년운동은 세계교회 역시 큰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 되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채수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교회가 한국교회의 희년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희년운동이 가지는 분단 한국의 민족사적 의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질서가 안고 있는 세계사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을 희년운동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서의 희년정신을 민족사적 전망으로부터 세계사적 전망에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가 있다. 채권국가와 채무국가의 세계적인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더욱 첨예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구화 현실 속에서 희년정신의 민족사적 과제를 세계사적 지평과 연결할 때에 한국교회의 희년운동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큰 희망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셋째는, 이북동포의 재난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남북나눔운동이다. 1980년대 말 이래로 동구권이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입장은 많이 달라졌다. 그동안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던 통일의 논의가 이제는 90년대 초를 분기점으로 하여 보수진영에서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보수진영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결성하여 그 산하에 북한교회재건위원회, 남북교회협력위원회, 통일정책위원회, 그리고 북한동포돕기위원회 등을 두고 있는데, 이는 한국교계와 한국사회의 괄목할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교회의 다수인 보수진영의 반공의식과 그들의 이벤트성의 과시적인 행사들은 여전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을 불문하고 통일과 관련한 명분을 전체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동일한 신앙 위에서 언제라도 일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북의 많은 동포들이 자연재해로 인해서 굶주려 고통 당하며 죽어가고 있다. 바로 그들을 위해 식량을 지원하고 비료를 지원하며 생필품을 제공하는 한국교회 전체의 공동적인 노력은 남북관계를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로 이끄는 초석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하는 기독교 본래적인 정신의 실현과 하나님의 형상의 살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려는 남북나눔운동은 이 시대 한국교회 전체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북동포가 굶주려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남교회의 나눔이란 것은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안하면 죄악인 신앙의 문제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 한국교회의 남북나눔이 활성화되고 남북교류가 촉진되며 더불어 민족공동체의식이 강화된다고 하면, 바로 그 때 민족분단의 문제는 극복되고 우리 민족은 통일의 자리에로 한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민족분단의 한 가운데서 통일에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 넘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