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5월 18일에 북한선교회와 평화와통일신학연구소 공동주최로 열렸던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강연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북한교회 재건론에 대한 재고








임희모 (한일장신대학교 교수, 선교학)








1. 서론





남한 교회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북한에 대한 선교적 관심의 표명으로서 북한교회 재건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교회 지도자들은 남한 교회가 북한에 교회를 세운다든지 혹은 북한교회가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남한 교회가 돕겠다는 말에 대하여 부정적 응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의견 불일치의 상황에서 남한교회가 북한에 교회를 일방적으로 재건하려는 안을 가지고 추진 중에 있다.


본 글은 기왕에 논의되고 있는 북한교회 재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북한교회 재건론은 몇 가지 충돌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이한 남한과 북한, 역사와 경험이 상이한 남한교회와 북한교회, 크기와 수에 있어서도 월등하게 차이가 나는 두 교회, 이러한 이유로 한 교회는 주려고 하고 또 다른 한 교회는 거부하고 있는 복잡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건론의 선교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기 위하여 본 필자는 현대 선교 신학적 주제들을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현재 논의되는 북한교회 재건론의 대강을 분석하려고 한다. 남한교회의 대교파들이 재건론을 추진하고 있지만, 교회 세우기를 선교적 과제의 중심에 놓기 때문에 그 내용은 비슷하다. 다만, 추진 방법이 약간 상이하다. 끝으로, 북한교회 재건이 필요할 경우, 어떠한 재건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재건을 위하여 남한교회가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가를 다루려 한다.





2. 북한교회 건립과 선교신학





1) 하나님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선교하신다.


북한교회 재건론이 뿌리를 두고 있는 선교 유형은 회심론과 교회이식론이다. 회심 유형은 경건주의적, 개인주의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으로 회심함으로서 개인의 영혼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선교이다. 교회이식 유형의 선교는 어느 교회 혹은 선교사가 다른 지역에 가서 자기 교파형의 교회를 세우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렇듯이 세워진 교회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한다. 회심 유형과 교회이식 유형은 서로 깊은 관련을 갖는다. 교회를 통해 개인이 영혼 구원을 받거나 혹은 영혼이 구원된 개인들이 교회에서 생활함으로서 기독교 왕국 (Corpus Christianum)을 넓히게 된다. 전통적으로 강조되어 온 이러한 회심 선교와 교회개척 선교는 선교사 개인적 차원, 선교회 차원 혹은 교회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선교는 선교하는 측이 선교 현지의 상황 (복음수용자, 문화, 기존 교회 등)을 감안하지 않음으로서 선교사의 일방적 주장이나 확신을 관철하여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선교로 귀결되었다.


선교역사는 이러한 선교적 과오를 반성하면서 1952년 이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성경 말씀 (요한 복음 17장 18절)을 토대로 등장시켰다. 이 개념은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 선교함으로서 선교활동체 (선교사, 선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선교활동체 안에서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선교활동체 밖의 세상에서도 구원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선교활동체는 세상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교의 목표로 자기의 주권 실현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신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 즉 샬롬을 구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한국교회를 몇 가지 점에서 깨우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자신의 구원 의지를 관철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 자신의 주권을 선포하고 실현하려 하신다.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하나님의 주권 즉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이데올로기로 분열된 사회를 이해하고 이를 비판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모두를 비판하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샬롬이라는 빛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샬롬 선교의 빛에서 자본주의는 나름대로의 강점과 단점을 내 보이고 비판당하여야 하고, 사회주의 역시 그 강점과 단점을 노출시켜 비판당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빛에서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나름대로의 장점을 인정하여야 하고, 부정점은 비판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북한 사회주의를 이해하고 비판하여야 하고 또한 남한 자본주의도 비판하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에 의하면, 하나님 이외의 선교활동체들 예컨대 교회나 선교회 혹은 개인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선교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이거나 기능으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교적 기능들은 자기 한계를 알 것이 요구된다. 즉 선교활동체 자신들을 중심에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사고 즉 교회중심적, 선교회중심적, 선교사중심적 사고를 버릴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요한 복음 3장 16절). 세상과 사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활동의 장으로서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증언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영역이다.


셋째, 주체적으로 선교하시는 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활동 즉 선교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겸손하여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를 각각 상대화시킨다. 이 교회들 역시 하나님의 샬롬의 빛에서 이해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즉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는 그 나름대로의 장점과 약점을 인정하고 서로간에 이해하고 서로를 위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회로서 자본주의 하에서 존재하는 남한교회, 이 교회 역시 자본주의 사회만큼이나 많은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 하의 북한교회 역시, 많은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 교회는 하나님의 샬롬을 한반도에서 이루기 위하여 협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상호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이해가 없으면 맹목적인 노력이 될 뿐이다. 남한교회는 북한에 존재하는 공식적 교회를 이단시하였다. 그리고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소위 지하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여겨왔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선교 시각에서 볼 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넷째,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통전적 선교를 실현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하나님의 선교는 복음화와 더불어 사회봉사 선교를 강조한다. 개인의 회심과 교회개척을 통한 복음화 선교가 필요하다. 또한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통하여 가난한 자, 차별 받는 자, 소외 받는 자를 없애고 인간적 삶의 질을 높이는 선교도 역시 필요하다. 이러한 복음화 선교와 사회복지 선교가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통전적 선교를 구성한다. 우리 교단 (예장 통합)은 오래 전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수용하여 실시하고 있다. 남한사회의 복음화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여러 부문에서 선교하여 왔다.





2) 성령은 교회를 변화시키며 선교를 하신다.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개념적으로 각 위가 내재적 연관을 통하여 존재하고 친교하고 섬김을 실행한다. 이러한 존재 양태를 지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선교학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신학자들과 교회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그리스도와 연관 주제들을 선교학적으로 논의하여 온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 역시 기독론 중심적 선교의 주제들, 예컨대 구원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등)과 성경 (문자적 성경해석과 복음 말씀 등)과 교회 (선교의 주체로서의 교회와 선교의 도구로서의 교회 등)을 강조함으로서 이것들과 비교되는 다른 주제들 예컨대 창조, 이성, 세상, 생명 등이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기독중심의 사고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혹은 교회 밖의 다른 세상이나 삶에 대하여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론 중심의 하나님의 선교 역시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거나 선교적 대응을 하는데 한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선교 상황은 새로운 개념의 선교를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남북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도 성령론적 사고가 요구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도 성령론 중심의 선교가 강조되어야 한다. 성령은 기본적으로 선교의 영으로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화해를 시키시고 생명을 살리는 영이다. 이러한 성령의 선교는 두 가지 면에서 그 효과가 드러난다.


첫째, 성령은 선교의 영으로서 직접 선교를 실행하신다. 성령은 그 자신이 선교적 힘이 되어 교회를 비롯한 선교활동체를 변화시킨다. 또한 선교활동체가 참여하는 선교현장에서 힘 즉 선교를 진행시킨다. 그러므로 성령적 선교는 교회 자체 안의 상황을 갱신시키고 또한 교회로 하여금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게 하여 선교현장으로서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참여시킨다. 또한 성령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정의와 평화의 사회, 창조보전의 사회가 되도록 만들고, 경직된 체제를 유연화 시키고, 분단의 담을 헐고, 차별과 소외의 간격을 극복하도록 하고, 남북간의 경계를 넘어서게 하고, 마침내 생명을 살리는 선교를 가능케 한다.


둘째, 변화시키는 성령의 선교를 인식하는 한 교회를 비롯한 선교활동체는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버리고 성령의 변화시킴에 따르게 된다. 즉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성령론적 사고를 갖게 하여 성령론적 선교를 하게 한다. 반면에 선교활동체가 성령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 혹은 성령의 사역을 배제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선교는 성령에 의한 선교라기 보다는 선교활동체 중심의 선교로 전락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선교가 왜곡된 선교라고 한다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인간 이기적 혹은 교회탐욕적 선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선교를 하려면 선교활동체는 성령의 선교를 숙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선교사와 선교회 그리고 교회 자신들을 변화시켜 기존의 편견에 사로잡힌 사고와 습관과 행동을 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령은 선교활동체 즉 교회에게 성령론적 사고를 하게 함으로서 변화의 선교, 정의의 선교, 평화의 선교, 화해의 선교를 하게 한다.


이러한 성령론적 선교는 선교현장인 남북 분단 상황을 변화시켜 분단극복과 화해, 그리고 하나됨을 실현시킬 수 있는 선교모델이다. 성령은 또한 남한교회를 변화시켜 북한에 대한 선교 혹은 교회재건을 효율성 있게 이끌 것이다. 즉 남한교회로 하여금 북한사회와 북한교회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도록 하여 통전적 선교를 실현하게 할 것이다.





3) 선교는 에큐메니칼 콘비벤츠 선교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교회를 "타인을 위한 교회"로 이해하고 도움을 베푸는 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교회론은 도움을 받는 자의 입장이 강조되지 않을 때 교회간의 관계를 지배와 종속의 위치로 내몰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의 교회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선교를 수행할 때 여기에 제국주의적 요소가 가미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선교 개념이 요구된다.


순더마이어 (Theo Sundermeier)는 라틴아메리카 상황에서 나온 콘비벤츠 (Konvivenz) 라는 개념을 선교 신학적으로 구체화시켰다. 이는 만남, 나눔, 참여, 상호 배움, 공동의 잔치로서의 삶 등을 주요 개념으로 한다. 이러한 콘비벤츠 선교는 교회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에큐메니칼 선교에 적합하다.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계급적으로 상이한 두 집단 간에 진정한 파트너쉽 선교, 공동체적 나눔과 상호 배움의 선교, 더불어 살기와 축제로서의 선교를 강조하게 된다.


남한과 북한간에 서로 이해하고 만나고 생각을 나누고 서로 배우고 마침내 삶의 축제를 벌이는 과정을 통하여 이질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콘비벤츠 선교인 것이다.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는 서로 다른 에큐메니칼 교회이다. 이 두 교회는 1945년 이후 모든 면에서 각기 다른 역사적 조건 가운데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이질화가 심화되어 있는데, 이 이질화의 크기만큼 상호 배움과 나눔이 클 수 있다. 양 교회간에 상호 나눔의 선교, 상호 배움의 선교, 상호 의존적 삶의 선교 (더불어 삶으로서의 선교)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





3. 북한교회 재건론





1) 배경과 의미


북한교회 재건론은 남한 내 본 교단 (예장 통합)은 물론이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기총)과 대다수의 대교단들이 지속적으로 논의하여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선교 방안이다. 재건론자들은 재건론의 배경을 대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첫째, 1993년 이후 북한은 전쟁 준비를 완료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통일은 갑자기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급히 재건을 추진하여야 한다. 둘째, 소위 "꾼"들이 잘못된 방향에서 선교에 덤벼들기 전에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북한선교에 대한 준비를 할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통일교와 같은 이단이 북한을 점령하기 전에 한기총과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주도적으로 교회 재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북한의 내일을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교회 재건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재건론은 계시사적 의미와 교회적 의미 그리고 사회적 의미를 통해 당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먼저 계시사를 살펴보면, 북한이 선교가 되어야 하는 땅끝이며 (사도행전 1: 8), 남북 통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통일로 이루어지며 (에베소서 1: 10), 공산주의 사상을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게 하며 (로마서 14:11), 분단 민족을 하나로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 (에스겔 37: 15-23)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교회 재건은 한국교인들의 기도의 응답이며, 북한교회의 재건은 교회의 생리상 자연스러운 것이고, 북한교회가 세워짐으로서 교회가 확장된다는 교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교회 재건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데, 민족 통합의 작업, 북한사회의 개혁 사업 및 의식개혁 사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들을 지닌 교회재건론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준 시대적 사명이므로 시급히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재건론의 원칙


북한교회 재건론은 3 원칙을 갖는다. 즉 연합의 원칙, 단일의 원칙, 그리고 자립의 원칙이다. 첫째, 남한교회와 해외동포교회는 북한에 교회를 재건하고 북한 주민들을 복음 화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연합체를 구성하여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한이 통일되어 북한 지역이 새로운 선교지로 부상하면 수많은 선교사들이 몰려들어 경쟁함으로서 효과적인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부정적 결과를 맺어 북한주민들을 복음화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남한 교회가 북한에 자교회를 하나 세운다는 차원에서 교회를 개척할 우려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남한교회가 돈 선교를 함으로서 선교지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킬 염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미 중국 조선족 선교와 러시아 선교에서 익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러 염려를 불식하고 효과적인 선교를 하기 위하여 교단간에 협력하여 창구를 일원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단일 창구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좀 더 실용적인데서 찾아진다. 만약 북한이 문호를 개방한다 해도 당분간은 아무나 북한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한에 존재하는 특정 기구를 통하여 질서 있게 교회 설립을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전도를 위하여 북한으로부터 일정한 협력을 얻어야 하는데 특정 창구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창구는 한기총의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적격이라는 것이다.


둘째, 북한에 하나의 단일한 개신교 교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주민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교단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단일 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한교회는 수많은 분열을 통하여 분파와 교단이 수없이 양산되었는데 이들이 북한에 선교를 하게 되면 그 수만큼 많은 교단이 북한에 생기게 되어 선교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파적 난립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한에 단일 교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 단일한 연합교회가 서게 되면 난립한 개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남한교회들은 연합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서게 될 교단은 하나로 하고 신학교는 초교파적으로 세우고, 개교회의 신학과 정치는 자율에 맡기는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셋째, 북한에 자립하는 교회를 설립하여 남한교회로부터 독립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지하교회가 북한 복음화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하교회 주도의 교회재건 원칙이 강조된다. 북한 교회는 자립하고 독립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 첫째 안은 처음 재건 단계에서는 남한교회가 자금을 지원하지만 차차 재정 지원을 줄여 자립하도록 한다는 방안이고, 둘째 안은 처음부터 자립 독립의 원칙을 강조하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에서 따온 것으로, 남한교회가 북한교회를 장기적으로 돕는다는 것이다. 북한 교회가 작지만 북한 교회로 하여금 주도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방침 중 어느 하나를 취할 것인가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 두 방안을 분석해 보면, 첫 번째 안은 제국주의적 선교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히 많다. 재건론자들은 북한의 지하교회를 교회재건의 파트너로 삼으려 하는데, 이 지하교회의 세력이 너무 미약함으로서 해외교회나 남한교회, 심지어 탈북자들이 북한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교회나 해외교회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게 됨으로서 북한교회가 무시되는 일방적 선교가 될 우려가 있다. 둘째 안은 장기간 지원을 해야 하는 안이긴 하지만 선교학적으로 바람직하다. 지금부터라도 미약한 북한교회를 지원한다면, 북한교회의 자립은 그만큼 시간적으로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3) 재건론의 추진


이러한 3원칙을 가진 재건론을 추진하기 위하여 교단별로 조직이 구성되고, 책임자가 임명되고,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첫째, 한기총의 재건론을 살펴보면,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조직되어 이 일을 관장하고 있다. 북한에 1950년에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는 2,850개 교회를 일차적으로 재건한다. 현재 남한 교회는 4만개 정도의 수를 가지고 있는데 복음화 비율은 30%가 못 된다. 북한은 남한 인구의 반 정도이므로 2만개의 교회를 세우면 30% 정도가 복음화 된다. 그런데 남한교회는 영세한 교회가 상당수에 이르므로 북한교회는 그 수에 있어서 남한교회보다는 좀 더 작게, 그러나 교인 수는 좀 더 많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에 약 1만 5천 개의 교회를 10년 동안 5차에 걸쳐 세우고, 1차에는 교회를 재건 차원에서 추진하고, 그 이후에는 개척 차원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3년에 1천만 신자, 1인당 1만원 헌금하는 교회재건 1만원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북한교회 재건 강령"을, 1994년에는 "통일 및 북한 선교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고 또한 동년에 "북한탈출동포돕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95년에 세워진 "북한교회재건 기금 적립방법"에 의하면, 북한의 농어촌 지역 교회 적립금: 5천 만원, 중소도시의 교회: 1억원, 대도시의 교회: 1억 5천만 원을 적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재건 예정교회 2,850교회를 교단별로 할당을 하였다. 해외 205 교회 (북미주, 기타 해외, 개인 등), 예장 통합과 합동은 각각 345와 357 교회 등이고 구세군 성공회 등도 포함하여 50개 교단 (개인, 해외교회 포함)으로 할당을 완료하였다.  


둘째, 본 교단 (예장 통합)은 1970년 이북교회대책위원회로 발족하여 북한선교를 담당하였는데 1991년 총회에 남북한선교협력위원회를 두고 그 안에 북한교회복구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당시에 향후 10년동안 100억원을 모금하여 북한교회 재건 사업을 벌이기로 하였다. 또한 노회별로 북한의 1개 지역을 선정하여 복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셋째, 기독교 대한감리회는 북한 선교를 위한 단일창구로서 서부연회를 두고 있다. 북한교회 재건을 위하여 전문위원회를 두고 장단기 정책을 연구하고 남한교회의 동참 과제를 개발하고 제시하고 있다. 서부연회는 과거 북한 지역의 388개 교회와 기관들 (병원 학교 등)을 재건, 복원하고, 또한 북한 전역 (12개도, 1개 특별시, 2개 직할시)에 570개 교회를 새롭게 건립하려고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 재건을 위한 화보집을 만들고, 과거 교회나 기관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또한 서부연회는 북한 지방을 분할하여 책임 감리사를 임명하고, 일정한 결산 규모를 가진 교회들에게 북한 지역 교회 재건을 분담시켜 책임감을 주고 있다.


넷째, 기독교장로회는 1983년에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두고 통일 운동을 하였지만, 북한교회 재건이나 개척에 관한 사항은 1988년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8월 둘째 주일을 평화통일 주일로 정하고, 이 날에 북한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한 특별헌금을 실시하고 있다.





4) 분석 및 평가


위에 언급한 북한교회 재건론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첫째, 북한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도 바울도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워 하나님 나라 선교의 확장 기지로 삼았다. 북한에도 교회를 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현하는 공동체적 구심점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세우기로서의 북한교회 재건론은 나름대로 의의를 가진다.  


둘째, 현재 논의되는 교회세우기로서의 북한교회 재건론은 남북통일 이후에나 실질적으로 가능한 이론이다. 이러한 재건론은 "준비"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갖지만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비현실적이다. 첫째, 남북통일은 현재 언제 이루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1995년부터 북한을 흡수하는 식으로 통일이 급박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아직 그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둘째, 남북통일은 문화접합 혹은 문화교류를 통하여 이루어질 때 진정한 통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질감을 극복하는 사람의 통일 혹은 문화의 통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가 그렇고 탈북자들의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없이 북한에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마냥 기다린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지금 무엇인가 실제적으로 북한에 대하여 선교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셋째, 북한교회 재건론은 북한 체제와 그 체제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남한교회가 일방적으로 북한측의 상대를 정하여 교회를 세우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재건론은 통일 이후에 진행될 사항을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남한 쪽으로 북한이 흡수되는 통일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통일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질문도 생기지만, 설령 흡수통일이 된다할지라도 남한교회는 복음을 전달받는 자들로서 북한 주민들이 50년 이상을 살아온 북한 주체체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이들을 대상으로 선교나 전도를 올바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사회주의 혹은 주체주의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반면에 남한교회가 속한 자본주의 체제를 기독교적인 체제로 간주하여 이를 북한 주민들에게 주입시키려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선교적 사고는 선교역사에서 일찍이 제국주의적 선교로 비판되어 왔다.


넷째, 남한교회가 지원하여 세우려는 북한교회의 청사진이 불투명하다. 남한교회는 북한의 지하교회를 택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을 시도하려고 한다. 재건론자들은 아마도 지하교회야말로 가장 올바른 신앙을 가진 무리로 생각하는 듯 하다. 즉 지하교회를 북한 사회주의 하에서 과거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보수하기 위하여 박해를 받으며 지하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의 모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건론자들은 지하교회를 고려하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일 대다수 북한 동포들의 삶의 정황 즉 사회와 문화를 읽어야 할 것이다. 복음 전도의 대상인 북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서 오랫동안 노출되어 살아온 사람들로서 (북한 사회주의를 반대하여 고립되어 지하에서 신앙을 유지해 온) 지하교회 교인들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교회 재건은 북한 사람들을 가장 잘 이해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교인들을 택하여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보통의 북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모델을 새롭게 설정하여 교회 재건을 혹은 선교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서두르면서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교회재건론은 인본주의적 선교가 될 우려가 있다. 인간적 의욕이 충만하여 시급히, 반드시 그리고 남한교회 일방적으로 북한에 교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재건을 위하여 재정 (돈) 지원과 더불어 신학적 교회 행정적 지원이 뒤따를 텐데 이것은 자칫하면 주종관계의 간섭 혹은 섭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또한 북한에 재건할 교회에 대한 교단별 할당은 또 다른 자파교회 이식운동으로 전락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교회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시대의 징조를 읽고), 성령의 역사 하심에 맡기는 한편, 인간이 준비를 하면서도 주님의 활동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 기대감을 갖는 선교, 하나님의 섭리 즉 성령의 역사가 개입되는 선교,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서 진행하는 선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4. 북한교회 재건론에 대한 재고





여기에서는 남한교회가 북한에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필요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성령론적 선교 및 에큐메니칼 콘비벤츠 선교 개념을 기본 전제로 하여 북한 교회 재건론에 대하여 몇 가지 비판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1) 북한교회 재건은 북한에 있는 교회가 주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오늘날의 콘비벤츠 선교 원리에 의하면 남한교회가 북한에 선교를 하여 교회를 재건하려고 할 경우, 북한에 기존하는 교회가 재건의 주도권을 잡고 남한교회는 보조하는 차원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남한교회가 북한교회의 어느 편을 택하여 재건을 추진해야 할 것인가? 현재 북한에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있고 그 산하에 몇 교회와 수많은 가정교회가 존재하는데 이들을 상대할 것이냐? 아니면 존재 자체가 불투명한 소위 지하교회를 상대로 정하여 이들을 지원할 것이냐?


재건론자들이 교회재건을 주도해야 할 것으로 강조하는 지하교회가 과연 교회 재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첫째 소위 지하교회의 실체가 있는 것이냐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상 오랫동안 노출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들이 주도적으로 재건을 추진할 수 있을까? 일제 패망과 더불어 한국이 해방되면서 소위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 재건을 주장한 그룹이 있었는데 여러 문제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혼란에 빠졌고 드디어 교회 분열로 치닫고 말았던 아픈 역사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오늘날의 북한교회는 사회주의 환경에서 거의 자생성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민족 주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주도한 교회가 북한에 존재하는 조선기독교도연맹 산하의 교회들과 가정교회들이다. 김흥수에 의하면,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서구적 의미의 국가교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교회는 국가가 교회보다 우위에 있어서 교회를 인정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는 모델인 것이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친정부적 성격을 지니고 교회보다 우위에 있는 정부의 지원과 통제를 받아 교리적으로보다는 정치 사회적으로 교회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을 국가교회 형태로 인정한다면 민족주의적 교회사적 시각에서 지하교회보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더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 필자는 지하교회나 조선기독교도연맹 산하의 교회나 다 북한에 존재하는 교회이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무리 지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하며 봉사의 삶을 산다면, 이들을 교회로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남한교회는 이들을 서로 분리할 것이 아니라 북한교회 구성인자들이 스스로가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여 단일한 교회를 만들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남한교회가 추진할 교회 재건의 주도적 상대를 지하교회로 할 것이냐 혹은 조선기독교도연맹으로 할 것이냐라는 문제까지 감안하여 남한교회는 북한에 세워질 교회의 청사진을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교회의 재건이나 건립의 주도권은 북한교회가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북한교회가 북한 지역의 교회를 주도적으로 세우고 복음화를 하도록 남한교회는 지원하는 차원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2) 그러면 남한교회는 북한교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남한교회는 선교의 대상인 북한 주민들이 사는 북한 사회를 편견 없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북한 주체사회에서 발전된, 남한교회의 선교의 파트너인 북한 교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지하교회와 조선기독교도연맹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둘째, 남한교회는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한다. 남한교회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자본주의적 남한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여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샬롬의 빛에서 남한사회를 분석 비판하고 샬롬의 실현을 위하여 선교하여야 한다. 남한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러한 선교적 비판을 가혹하리만큼 진지하게 한다면 북한교회는 그만큼 남한교회를 이해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노력 속에서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는 서로 만나 선교적 나눔과 상호 배움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남한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전적 선교에 참여하여야 한다. 우선 삼위일체하나님의 선교는 성령의 선교이다. 성령은 선교의 영으로서 우리의 선교적 사고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성령에 의존함으로서 성령론적 사고를 갖게 되면 인간의 욕심이 숨어들 우려가 있는 인간중심적, 교회중심적 선교를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성령론적 선교는 고착된 구조를 변화시키며 더불어 살게 하는 선교이다. 남북한을 화해시켜 평화와 통일 선교를 추동할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동등성을 인정하는 선교를 하게 한다. 남한교회는 선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을 비우고 북한에서도 북한교회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선교를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남한교회는 하나님께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주도적으로 민족을 구원하고 화해시키는 활동을 하심을 믿어야 한다. 또한 남한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함으로서 남한과 북한의 교회들이 민족구원의 신앙을 고백하여 왔음도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인정과 존중을 통하여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는 민족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세워야 할 민족교회는 서구적 교회가 아닌, 서구선교사들이 전한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민족적 토착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남북한 교회는 진지하게 논의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반도에서 통전적 선교를 실시하여 사회복지 선교와 교회 세우기 선교를 병행하실 것이다. 여기에 남한교회가 참여할 공간이 있는 것이다. 사회복지 선교에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지원하고, 북한 교회가 요청하면 교회세우기에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북한교회 일각에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기도 하다.  


넷째, 남한 기독교인들은 통일의 희년 즉 남북간에 감사와 나눔과 축제를 준비하여야 한다. 이러한 준비중의 하나가 북한에 있는 재산을 포기하여 북한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이 북한에 남겨놓은 재산 예컨대 토지나 집 등을 북한 주민들이 오랫동안 점유하여 경작하거나 사용하여 왔다면 이에 대한 재산권을 넘겨주라는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 이러한 재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빼앗기는 형제들에게는 통일의 의미는 희석되고 통일이 되지 않음만 못한 결과를 빚고 말 것이다. 즉 이들에게 통일은 경우에 따라서는 생존권을 빼앗기는 비참함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통일은 신앙의 사건이다. 이 신앙의 사건을 새로운 삶을 알리는 희년으로 보게 되면, 이러한 신앙 속에서 재산권을 포기함으로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토지는 원래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다 (레위기 25장 23절). 인간은 하나님의 토지를 잠시 빌려서 사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남한교회는 통일이라는 희년을 북한 사람들과 더불어 감사하고 즐기고 나누어야 할 것이다.





3) 남한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북한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가?


첫째, 남한과 북한을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한다. 남북 화해가 이루어지고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1974년 통일에 대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하였고, 2000년에는 6.15 공동선언을 도출하였고 남북 통일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기도는 통일의 비전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둘째, 북한 인민들과 더불어 사는 연습을 하여야 한다. 먼저 북한동포들의 삶의 정황을 선교 차원에서 있는 그대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통하여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나 통일의 물꼬를 튼 마당에 아직도 북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해서는 결코 바람직한 선교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에 대한 이해도 넓혀야 한다. 교회 세우기가 선교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오래 전에 간파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교회 세우기에만 매달리는 모습은 실로 선교적이지 않다. 또한 남한교회는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와 중국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선교함으로서 앞으로 있을 북한 선교에 대한 연습을 해야 한다.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선교를 함으로서 사회주의 체제하의 사람들을 알고 배우고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북한 인민에게 선교하기 위한 예행 연습과 같은 것이다.  


셋째, 남한교회는 교인들이 북한 문화를 이해하도록 남북간 교류를 추진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남북한 교회 인사들 (평신도들 포함)의 교류와 방문이 포함된다. 남북간의 일상사를 포함하여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사항도 교류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남한교회는 북한에 대한 사회복지 선교를 실시해야 한다. 특히 식량난에 굶어죽어가는 북한 인민들을 위하여 무조건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남한교회는 이에 대하여 사회복지 선교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선교 혹은 북한교회 재건은 단기간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기다림의 인내를 배우는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장기적으로 인민들을 위하고 북한교회를 위한 것인가를 북한 당국과 북한교회와 논의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한교회는 북한교회 재건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기금을 북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 선교 기금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북한 교회 지도자들은 남한교회로부터 사회복지 선교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선교원리에 의하면, 선교는 수용자 즉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남한교회가 북한인민이나 북한교회에 사회복지적 접근을 한다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첫째, 남한교회가 지혜로운 교회가 될 것이다. 북한교회가 남한교회의 지원 하에 교회 세우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북한에 교회를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재건기금을 마냥 쌓아만 둔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곡간에 재물을 쌓아두고 이를 사용하지 않고 만족해하는 어느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 (누가복음 12: 13-21절)가 연상되는 것은 왜 그럴까? 둘째, 북한당국과 북한사회가 북한교회로 하여금 교회 재건을 이루도록 여건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사회복지 선교를 통하여 북한 당국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면, 그리고 북한사회에서 차지하는 기독교의 위치가 격상된다면, 또한 북한인민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가 친화적으로 변한다면, 가까운 후일 혹은 먼 후일에 북한교회와 북한인민들에 의하여 교회 재건이 진행되리라 생각된다. 남한교회는 이러한 사회복지를 통한 선교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서 북한교회 재건을 위한 여건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남한교회는 북한교회가 북한 전역에 교회 세우는 것을 돕고 북한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