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느낀 아버지의 체온



[오마이뉴스 양허용 기자]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일요일부터 벌써 3일째입니다. 주말에 잠깐 날씨가 맑았던 것을 빼고는 지난 주부터 거의 매일 비가 내립니다. 너무 오랫동안 비가 그치지 않으니 마음속에서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흐린 하늘 때문에 마음마저도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젠 그만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잊지 않고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떨쳐지지 않는 기억. 어쩌면 이렇게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 때문에 더욱 비오는 날이 싫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벌써 30년도 넘은 이야기네요. 수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산이 귀한 시기라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깜빡 잊어버리고 우산을 가져가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우산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수업시간 내내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던 것 같습니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교실을 나서는데 그 때까지도 비는 멈추지 않고 더욱 세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우산을 준비해 온 친구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 혼자 문 앞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죠. 참 눈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노란 비옷을 입고 교문을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집에 계시는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는, 말 그대로 장돌뱅이셨죠. 한 번 지방으로 가시면 몇 달씩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기에 평소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마침 아버지가 집에 계셨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그날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오셨던가요.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저는 마냥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아버지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우산도 없이, 달랑 우비 하나만 걸치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비 맞지 않게 마중 나오시면서 우산을 들고 오지 않다니….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금세 풀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비를 벗고 저를 업더니 그 위에 다시 우비를 걸쳐 입으셨습니다. 노란 우비로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저는 아버지의 등에 엎드렸습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습니다.



교문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나쳐 가는 아이들이 아버지께 등에 업은 게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속으로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가 나 마중 나온 거야’하며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 때 만큼은 정말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따뜻한 아버지의 등 뒤에서 저는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먼 길이었는데, 집에 거의 다 이르러서야 잠에서 깨었습니다. 깨어보니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아 집 앞의 계단을 내려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빠, 여기가 어디야?”



아버지는 집에 거의 다 도착했다고 알려 주시더군요. 집에 돌아와 비옷을 벗고 저를 내려놓으신 아버지께서는 절 보며 씽긋 웃어 주셨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어찌 되었는지 안타깝게도 아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 아버지 등 뒤에서 느꼈던 그 따듯한 체온만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 때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도 벌써 20년이 가까워지는군요. 창 밖으로 저렇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리워집니다. 가끔씩은 아버지의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아버지. 다시 한 번 그 때 아버지의 따듯한 체온을 느껴볼 수만 있다면….



오늘도 아버지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양허용 기자 (hyang66@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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