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1일자 동아일보/ 서미선 서울 구룡중 국어교사, '책으로따뜻한세상만드는교사모임' 회원]



고전 읽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학 시절을 생각하며 고전을 다시 읽고 있다. 책을 놓고 더듬거리는 내게 고전 명작은 넘지 못할 산이었다. 함께 읽어주는 이도 없었고, “네가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해주시는 선생님도 없었다. 지적인 치기로 붙잡고 있기에 몇몇 책들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전이 주는 중압감으로 내 청소년 시절의 책읽기가 주눅 들었다는 생각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눈높이에 맞는 재미있는 책을 추천했던 내게 고전은 다시 넘어야 할 산이다. 이제는 눈높이에 맞는 감동적인 책과 함께, 더듬거리며 우려내어 읽는 고전도 ‘함께 이야기하며’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던 차에 우리 학교 학생이 같은 책을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다음은 그 여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글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구나. ‘주류’라고 부르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길을 찾은 사람들이 있지. 학교에서 잘 지내고, 세상의 성공을 거머쥐고, 주어진 수순을 밟아서 남보다 빠르게 성공에 안착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그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하고 또 은연중에 평가받곤 해.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학교 사회의 주류는 아니야. 낙제점을 맞아서 퇴학을 여러 번 당한 불량학생이지. 그러나 콜필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생각해보렴. 자의식이 풍부하고 섬세한 눈길을 지녔어. 단지 세상에 맞지 않을 뿐이야. 그 세상이란 게 얼마나 이중적인 것인지, 콜필드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어른들이란! 나름대로 존경하는 선생까지도 말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허위의식과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더구나. 나는 너무 막 나가는 것 같아서, 우리네 청소년 또는 내 청년기와 문화적인 코드가 맞지 않아서 콜필드의 내면을 충분하게 이해하진 못했어. 왜 이렇게 막 나가는지, 안타까웠지.



하지만 몇몇의 성공 사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거야. 다양성이 행복하게 어우러지는 사회가 풍요로운 사회거든. 콜필드처럼 겨울이 오면 호수의 물이 얼어서 오리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그 순수한 마음을 고스란히 지키면서 어른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세상의 기준과는 동떨어졌다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내면의 고인 샘물을 가치 있다고 봐주는 세상을 열망하며 콜필드의 방황과 절망을 읽었지.



학교에 있는 선생으로서 ‘호밀밭의 파수꾼’은 좀 각별하단다. 공부 때문에 서울 강남의 땅값이 치솟는다는 이 황당한 나라에서 나는 공교육 교사로서 어떤 선생이어야 하나. 공부마저도 성골과 진골, 육두품으로 나뉘듯이 부모에 의해 길이 달라지고, 키워지는 세상에서 주류에 편승하는 교육을 시키는 것은 아닌가, 문득 돌아보게 하는 책이란다….”



답글을 받은 그 학생이 시를 보내왔는데, 제목은 ‘소식을 전하는 게 아이들이었다면’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 어른들도 함께 읽고 얘기해볼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