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사로잡는 거대한 감동



식민지시대를 깊은 역사 인식으로 탐구한 대하소설. 김제 출신의 인물들이 군산, 하와이, 동경, 만주,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옮겨서 40여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제시대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일제의 폭압에 맞선 우리 민족의 저항과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부각 시키고 있어 민족적 긍지와 자긍심, 자존심을 회복케 하는 역작이다.

수많은 취재여행과 자료조사를 거쳐 씌어진 <아리랑>은 우리에게 일제 36년사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지만,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의 과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의 단초는 무엇인가. <아리랑>은 그에 대한 답안이다.



민초들의 피와 눈물 갈피갈피 배었네



문화사(文化史)적 사건, 그것은 우리 근.현대사 1백여년을 문학으로 복원한 대하소설 3부작[태백산맥],[아리랑][한강]의 완간(전 32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작가 조정래씨는 지난 20년 동안 글감옥에 갇혀 있다 지난달 중순 [한강]을 탈고하고 나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그 20년 세월 동안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고 마흔살이었던 조씨도 나이 예순을 맞았다. 무려 5만3천여장의 원고지가 쌓여 높이가 5m50㎝에 이른다.



출옥 후 조씨는 탈장(脫腸)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대하소설 쓰기는 중노동과 같아 위궤양, 둔부의 종기, 오른팔 마비 등 여러 가지 직업병이 작가를 괴롭혔다.

이번엔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장이 내려앉은 것이다. 7개월여 전 탈장 진단을 받았으면서도 탈고를 미룰 수 없어 참고 또 참아가며 작품을 써내려간 오기가 한국 문학사의 한 장을 새로 쓸 수 있게 했다.

그의 대하소설 3부작은 민족사적 고통의 뿌리와 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을 근본에서 캐들어가며 한 세대가 그 앞세대를 이해하게 하고, 좌파와 우파가 삶, 그 자체에 대한 자애로움으로 화합할 수 있게 한다.

현재 20~30대인 사람들의 할아버지 세대가 나오는 [태백산맥],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을 다룬 [아리랑], 마지막으로 아버지 세대를 다룬 [한강]까지 작품에 등장하는 1천2백여명의 인물이 다 우리 자신이며, 멀지 않은 이웃이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의사가 크게 웃지도 말고, 기침도 조심하라고 해요. 하지만 마음이 이렇게 여유로우니 몸 불편한 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하루 평균 30장 가량 쉼없이 썼지요. [태백산맥]을 만년필로 썼는데 너무 무겁고 손가락이 눌려 군살이 박였습니다. 그래서 세라믹펜으로 바꿨어요. 다 쓴 펜을 작품마다 모아놓고 보니 편마다 60개가 넘더군요. [한강]을 탈고하고 나니 아들이 컴퓨터를 사줬어요. 이제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법도 좀 배워야죠."



*** '글감옥'에 갇혀 지낸 20년

-소설 속의 그 많은 인물들과 삶을 꾸미다 떠나 보내니 마음이 허허롭겠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현실에서 만난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 안나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아무리 한 장면만 스치고 지나가는 단역이라 해도 내 소설 속의 인물은 다 기억이 납니다. 특히 [태백산맥]에선 하대치와 외서댁, [아리랑]은 공허스님과 필녀, [한강]에선 유일표와 임채옥 같은 인물이 좋아요."



-대하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합니다. 역사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르고 같아야 합니까.

"역사라는 개념이 참 모호해요.기록된 것만 역사의 반열에 오르고 기록이 통하지 않으면 가치 부여나 객관성 확보를 할 수 없다고 하죠. 문학은 이긴 자들의 기록에서 빠져 있는 부분, 즉 기록된 역사의 부당성을 인간적인 면을 통해 파헤치는 분야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재구성하는 일이죠."



-해학과 기지에 가득찬, 그리고 분단의 모순 때문에 신음하는 민초들의 삶을 선생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는 없습니다. 그것은 선생이 기본적으로 로맨티스트이자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이념과 역사적 당위에 치우친 것 같기도 합니다. 예컨대 [태백산맥]의 염상구를 애정을 가지고 그려내다 결국 죽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사학자들은 사건만 보지, 삶이 없어요. 삶처럼 소중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태백산맥]의 이념 대립시대에는 또한 그렇게 때려 죽일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평범한 시민의 시대에는 그 경계가 모호해요. '한강'의 친일파 출신 국회의원 강기수 같은 인간도 그 삶을 엮어가다 보면 때론 긍정성을 발견하게 되요. 물론 작가가 그들도 때로 좋은 일을 했다고 대놓고 말할 수야 없죠."



*** 원고지 쌓으면 5m50㎝ 높이

-한강의 기적이 누구의 피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민주화가 어떻게 해서 성취됐는지 [한강]을 보면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그런데 민주화된 정부가 이번에 두번째인데 왜 이렇게밖에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민주화는 의지있는 사람들이 만든 거지, 정치인이 이룬 게 아닙니다. 이번 [한강]에 내가 다 까발렸어요. 아마 그거 보면 그 사람들 '조정래 저 자식이' 이럴 겁니다. 김영삼.김대중씨는 4.19에 대한 참회가 없어요.박정희란 사람이 군사독재로 그 두 사람을 정치적 영웅으로 만들어 준겁니다. 거저 얻은 거죠. 그들의 소양에도 민주의식이 부족했고요. 박정희가 만든 영웅의 옷을 입고 그들이 정치를 철저히 망가뜨리니 설문조사에서 박정희가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것 아닙니까. 박정희에게 은혜를 갚은 거죠."



-작가란 온갖 모순과 갈등이 뒤엉킨 사회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옹호하고 실천하고 전파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셨지요.

"일제 시대에 무식한 사람들은 친일 못했습니다. 어느 사회나 지식인들이 잘못하면 엉망이 되는 겁니다. 진정한 작가란 그 어느 시대, 그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되어 있고,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로 말하기 때문이죠."



-[한강]에선 전 포철 회장 박태준씨를 높게 평가하는 등 기업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도 보입니다.

"사회 지도층이 박태준처럼 했으면 지금 국민소득 4만불까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기업가 정신을 우러러보고 싶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삼성을 되게 싫어했는데 이제 좋아하게 됐어요. 조건 없이 대학에 30억을 기부하고 소비자 관리에까지 기업정신이 살아있는 기업이라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에 이사 하면서 TV도 삼성 것을 샀지요."



*** "태백산맥의 하대치 좋아해"

-작가 중에서는 조선생도 재벌축에 듭니다. 인세는 어떻게 쓰셨습니까.

"이제까지 대하소설 세 편이 총 9백만부 정도 나갔습니다. 십삼사 년 동안 매년 억대 세금을 냈어요.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동시에 많이 나갈 때는 소득세가 2억원이 넘었지요. 그것만 보면 많이 남은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나는 작품에 재투자합니다. [아리랑]의 경우 미국.러시아.동남아 등을 돌며 취재하는데 2억원 이상이 들었죠. 그 [아리랑]을 팔아 [한강]에 재투자한 것이고요."

(조씨는 국산 최고급형 승용차인 체어맨을 타고 기사도 두고 있다. 본격 문학작가가 글만 써 이 정도를 누릴 수 있다는 건 한국인의 문학 사랑이 지대함을 입증한다)



*** 작가는 권력의 오류 지적해야

-문학 독자가 없다느니, 문학이 죽었다느니 하는 말이 다 기우 같군요.

"독자 수준이 작가 수준 이상으로 올라와 있어요. [아리랑]이 1백만부 돌파하는 데 13개월 걸렸는데 [한강]은 출간 석달 만에 돌파했어요. 진득하니 쓰면 다 되게 돼있어요. 작가가 자신을 신뢰해야만 하듯이 독자들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그런 면이 부족해요."



-20년 동안 내조하느라 부인 김초혜 시인이 시도 못 썼겠습니다.

"이젠 아내의 잃어버린 인생을 찾아줘야죠. 앞으로 20년 동안 아내를 모시고 매주 여행을 다닐 겁니다. 그러다 보면 아내의 시심도 새로워지겠죠. 더구나 몇 달 전에는 아내가 큰 수술을 했습니다. 나는 배를 6㎝밖에 안 쨌는데 아내는 20㎝가 넘어요. 너무 미안하고 눈물이 나 자식들도 병원에 못오게 하고 나 혼자 간호를 했습니다."



-가족 사랑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내 황혼의 인생에 새로운 푸르름을 안겨주는 손자와 그 애의 세대를 위해 앞으로 동화 두 편을 쓰기로 했습니다. 대학 입학 후 아들에게 [태백산맥]을 손으로 베끼게 했어요. 공부도 할 겸 작가의 아들로서 최소한 애비가 어느 정도 고생을 겪어냈는지 체득시킬 필요가 있었던 거죠. 며느리도 이 일을 했으니 우리집엔 태백산맥 원고지가 세 벌이 있습니다."

- 중앙일보 행복한책읽기 우상균기자 (2002년 2월 7일)





작품만 좋으면 독자는 몰린다



조정래(59)씨의 대하소설 3부작이 판매 1천만부를 돌파했다.

22일 현재 [태백산맥](전 10권) 5백50만권, [아리랑](전12권) 3백50만권, [한강](전 10권) 1백20만권 등 1천20여만권이 판매됐다. 국내 작가 중 책을 1천만권 이상 판 사람은 소설가 이문열씨가 유일했었다.

조씨의 기록은 이씨에 이어 두번째지만 순수소설이 안팔리는 시대에 세운 것이라 더욱 뜻깊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같은 기록은 지난달 초 최근작인 [한강]의 판매가 1백만부를 넘어서면서 예고됐다. 게다가 대통령의 3남 김홍걸씨가 구치소에서 [한강]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지난 19일을 전후해 알려지면서 주문이 두 배로 늘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중순 완간된 [한강]이 두 달이 안돼 1백만부 이상 팔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영상 매체의 영향력 확대 등을 이유로 문학독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기존의 '문학 시장 축소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전작인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1백만부 돌파에 걸린 시간을 훨씬 단축했다. 출판계에서는 [한강]을 본격문학 시장의 생존 여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마저 팔리지 않는다면 본격 문학 시장은 회복 불가능하리란 전망이었다. 이전작에 비해 작품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은데다 작가 스스로 "3부작 중 가장 소설다운 작품"이라고 공언했었기 때문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태백산맥]이 초베스트셀러가 된 데는 진보적 시각에 대한 갈망 등 지난 연대의 시대분위기가 한몫했었지만 [한강]은 그렇지 않았다"며 "이제 40대 독자를 위시해 독자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잘 쓰인 작품은 파급력 있게 읽힌다"고 분석했다.



소설이 독자들을 끌어들일 순도 높은 이야기성을 지니고 있다면 독자들은 그에 걸맞게 책을 사서 읽고 주위에 추천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해 문학 독자의 변화 운운하기 이전에 독자를 끌어들일 문학작품이 나오고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출판사가 인터넷서점의 [한강] 판매 자료를 종합해 낸 통계를 보면 주소비층인 30~40대 초반(53.9%)외에 20대(37.1%)와 기타(9%)가 46.1%를 차지하고 있어 [한강]이 신규 독자층을 끌어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조정래씨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졌다. 그는 "내 작품을 잘 보면 장면 전환이 상당히 빠르고 한 이야기가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치밀하게 짜여졌다는 걸 알 수 있다"며 "영화와 TV드라마의 빠른 이야기 전개에 길들여진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고려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한강]의 성공은 또 서구에선 한물간 장르로 치부되는 대하소설이 한국적 현실에선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하소설의 기본은 역사적 사실을 어떤 입장에서 해석할 것인가이기 때문에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근.현대사를 지닌 한국에 적합한 장르인 것이다.

특히 조씨의 대하소설은 이긴 자들의 기록에서 빠져 있는 부분을, 즉 기록된 역사의 부당성을 인간적인 면을 통해 파헤치는 전통을 세웠다. 역사학과 대하소설의 차이점을 이렇게 명확히 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씨는 "대하소설의 인기는 현대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라는 대중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며 "근대사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한국의 경우 대하소설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1.2차 세계대전 이후엔 역사의 극적인 반전이 없어 대하소설이 거의 창작되지 않고 있다. 이는 대하소설이 역사적 조건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화된, 점차 안정돼가는 우리의 경우도 문학의 미래를 대하소설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조정래씨가 세운 대기록이 기록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역사적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 한국 대하소설의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 중앙일보 행복한책읽기 우상균기자 (2002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