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세가족







서울과 서북쪽으로 등을 대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동산동 ‘큰고을’ 마을에는 마당 가득 온갖 꽃과 나무들이 있고 텃밭에는 갖가지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어 ‘식물백화점’으로 불리던 집이 있었다.올 겨울 설을 쇤 뒤부터 이 집은 ‘한지붕 세가족’으로 별명이 바뀌었다.



은퇴한 심원보씨(65)와 부인 박장옥씨(62),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아들이 조용히 살던 심씨집이 한지붕 세가족,식구 11명으로 늘어난 것은 순전히 이 땅의 육아정책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탓이 크다.남편의 봉급만 바라보다가는 자녀교육도 제대로 못할 거라며 딸과 며느리가 일을 시작하면서 친정과 시댁 쪽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것.



중년주부로 어렵사리 일자리를 잡은 딸 현경씨(35)는 지난해 5월 사위 최혁재씨(34),외손녀 지연(3)이와 함께 친정으로 들어왔다.올 2월 아들 규복씨(37)도 며느리 정희숙씨(36)가 일을 하게 됐다면서 손녀딸 나연(4)·소연(2)이를 데리고 본가로 합쳤다.자연히 조용하던 집안이 아이 셋의 웃음소리,싸움소리,울음소리로 장터가 됐다.



할아버지는 “11남매 맏이로 태어나 늘 시끌벅적하게 살다가 동생들,아들 딸 시집 장가 보낸 뒤 적적했는데,이제 사람 사는 집 같다”고 좋아한다.할머니도 “젊은 애들이 일하겠다는 데 도와 줘야 하지 않겠냐”며 “시누 올케가 자매처럼 지내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말한다.



부모들이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해도 자식들은 ‘에구구’ 절로 나오는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들을 때마다,기저귀를 개키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다.



희숙씨(36)는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 털어놓는다.시누이 애를 보고 있는 시어머니한테 어린 자매를 맡기는 게 염치 없었지만 아이 둘을 맡길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특히 아직 기저귀를 차는 소연이가 문제였다.



현경씨도 언니 얘기에 끄덕인다.친정에 들어올 당시 지연이가 15개월이어서,정말 맡길 데가 마땅치 않았다.희숙씨는 “일하는 여성들은 많아지는데 나라에선 뭘 하는 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시누이 올케,일종의 ‘적과의 동거’인 셈인데 같이 살아보니 어떠냐고 물었다.육아 얘길 할 때는 찌푸려졌던 얼굴들이 가족 얘기를 꺼내니 밝아진다.희숙씨와 현경씨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좋은 점이 더 많다”고 입을 모은다.



희숙씨는 우선 부부싸움이 줄었고,아이들 성격이 좋아졌다고 했다.따로 살 때는 하루종일 살림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잦은 야근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었으나 합가하면서 그것이 싹 사라졌다.어른들 눈이 무서워 조심하기도 하지만 일을 나눠 하니까 힘이 덜 들기 때문이란 설명.



‘아침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규복씨를 위해 아침은 희숙씨가 준비한다.“밥상에 수저 한벌 더 올려놓으면 된다”며 시누이 남편 혁재씨의 아침도 꼬박꼬박 챙겨준다.덕분에 아침잠 많은 현경씨는 마음놓고 30분쯤 더 잘 수 있다.



집안 정리와 청소는 현경씨 몫.다행히 두 사람 모두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일이 아니어서 오전에 그럭저럭 집안 일을 해놓고 집을 나선다.현경씨는 “시누이 올케,자매,동서,또는 마음맞는 이들끼리 연립이나 널찍한 단독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도 육아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안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오전 11시쯤부터 저녁 8시쯤 엄마들이 들어올 때까지 아이들은 온전히 할아버지 할머니 몫이 된다.할아버지는 “제일 어려운 것이 저희들끼리 싸울 때”라며 그래서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단다.나이와 상관없이 잘못한 아이를 야단치고,정직하게 잘못을 얘기할 경우 용서해주기로 한 것.동생이 잘못했는데 같이 놀던 큰 아이를 야단치면 마음에 상처를 입기 때문이고,정직하게 얘기해도 야단을 치면 거짓말을 하게 될까봐서다.



아이들 싸움은 두 엄마들에게도 가장 골치 아픈 일이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해 아직 이 때문에 부딪힌 일은 없단다.시가살이 처가살이에서 남자들은 고래 싸움에 낀 새우처럼 되기 일쑤일 텐데,이 집 남자들은 한결같이 복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처가살이 1년이 다 돼 가는 혁재씨는 “옷차림만 신경쓰일 뿐 별로 거리낄 게 없다”고 말한다.규복씨도 “일이 많아진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모여 사는 게 좋다”며 너털웃음을 웃는다.희숙씨는 한술 더떠 시동생들이 빨리 결혼해 동서도 한집에서 형님 아우 하며 살았으면 좋겠단다.



“아이고 내보내야지.걔네들까지 어떻게 같이 사니?”



시어머니는 며느리 말에 얼른 제동을 건다.할머니가 힘들긴 힘든가 보다.



김혜림기자 mskim@kmib.co.kr



*출 처: 국민일보 2002.4.22

(옮긴이:류기우)